Book Review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

soocut28 2025. 5. 10. 07:48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
이희근 

너머북스

2008년 12월

 

주말에 혼자서 책을 읽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날인 것 같다. 할인마트를 향하며 운전을 하다보니, 어디 교외라도 사뿐히 달려 가고 싶었던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주 목요일에는 홍콩과 도쿄로 출장을 떠나는 일정이 잡혔다. 이래저래 한참 바쁜 시간을 보내야 된다. 그러니 어차피 좋은 날씨에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항상 직업을 이야기할 때 마다, 좋은 선배들의 도움으로 다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의 일에 대한 만족감을 가지며 직장을 다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직업 상, 다른 곳으로의 피치 못할 출장을 떠날 때면, 이것이 물론 여행을 가는 것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가진다는 것을 알지만 설레인다. 언제나 낯선 곳을 향하는 걸음은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의 이방인이 되어 보는 것은 그다지 나쁜 경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다. 문득 나는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외국인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과의 만남의 기회는 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면서 그 구성원이 이미 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따라서, 우리 문화의 다양성과 개방성 그리고 유연함을 나는 언제나 지지한다. 단일 민족의 낡은 화두와 신화를 내 어린 시절에는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온 나라가 떠들어댔다. 반만년의 단일 민족국가, 그것은 싸구려 자본주의와 귄위주의 정권과 맞물려, 사람들의 편협함을 자극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환상에 여전히 젖어 들고 있다. 몇 년 전에 1호선에 보았던 정신이 이상했던 한 노인이 흑인 여성을 보고, "니그로"라고 부르던 일이 생생하다. 그런 편협함에서는 일본은 우리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들의 편협함과 망상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지 않는가.

외국인 거주자가 전체 인구의 2%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로 변모하고 있는 이 시대에, 역사를 통해 한민족에 동화되었던 이민족들의 양상을 정리하는 이 교양서는 매우 흥미롭다. 저자가 말한대로, 로마, 중국의 당, 몽골, 대영제국 그리고 미국 등이 인종, 종교, 민족 등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므로 세계적인 패권을 가진 극소수의 제국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 역사에서 이민족들이 유입된 것은 대체로 첫번 째 중국의 전란 혹은 왕조 교체기에 유입된 중국유민, 둘째 만주 등지에서 유입된 발해유민, 거란인, 몽골인, 그리고 여진인, 셋째 전쟁을 통해서 국내에 머무르게 된 임란 때의 왜군, 명군, 넷째 해상교역을 통해서 국내에 거주했었던 무슬림 상인들이 그것이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국내로 유입된 이들 이민족들이 그 후, 어떻게 정체성을 확립했는 지에 대해서 다양한 사료를 통해서 그 양상을 유추해보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내용은 이미 타서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것이라 그다지 새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부분으로는 고대사 부분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여전히 지루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부분이고, 따라서 조심스럽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데, 일단은 삼한의 성립과 이를 구성한 민족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중국측 사료를 근거로 마한은 토착세력이 주도하였고, 진한과 변한은 진나라의 무리한 토목공사 등의 학정을 피해서 유입된 진나라 유민들에 의해서 성립되었다고 추측한다. 남북한 학자들이 삼한의 성립과 성격을 한반도 독자적인 세력에 의한 것으로 주장하는 바와는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진, 변한 사람들이 특징 즉, 편두가 마한 사람들과는 다른 습속인데다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실체가 드러난 편두의 유골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위만 조선의 경우도, 한나라 성립 후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이를 차지했다고 보아, 위만이 연나라에 있었던 고조선 사람이라는 국내의 학설과는 대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만, 위만이 기존의 지배층인 고조선 호족들과의 연합을 유지하면서, 국명도 그대로 유지한 점을 들어, 그 국가 정체성은 우리 역사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예는 남중국에서 남하하여 남월에 들어간 중국 이주민 세력의 존재와도 상당히 비슷한 양상을 띈다는 점이다.

한일간 고대사 쟁점의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우리들에게 임나일본부설은 하나의 식민사관이고 받아 들여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고대사에 있어서 왜의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는 피해야 될 것으로 본다. 실제로 광개토대왕비 그리고 삼국사기 등에서 백제와 신라가 왜와의 관계개선을 위해서 왕족을 인질로 보내는 등, 왜의 군사적 역량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왜는 고구려의 2번에 걸친 원정으로 그 군사적 역할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왜의 일정한 잔존세력이 가야지방에 있었고, 따라서 왜의 위치를 단순히 일본열도에 비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일본부는 이러한 왜왕의 외교사절의 성격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일본부는 실제로는 가야의 영향을 받고 가야와 영합한 존재로 보인다. 이는 그들이 왜왕의 정책과는 반하는 가야 지향적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한 성립, 위만조선,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기존의 학자들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삼한 성립에 대해서는 공부가 부족한 관계로 딱히 내 주장을 말할 바가 못 되지만, 위만조선에 대한 저자의 시각에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자칫 그 논의가 엉뚱하게 전개될 수도 있다고 본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왜의 존재는 6세기 이후에나 가능한 시점에서 과연 한반도에 있었던 왜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가 이 논쟁의 핵심이 될 듯 싶다. 그러한 성격 규명이 확실하게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한 학문적 결론은 더 빨리 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