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가야와 임나

soocut28 2025. 5. 10. 07:50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가야와 임나
저: 이희진

출판사: 동방미디어

출판일: 1999년 5월

 

우연히 선택한 책이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관심있게 보는 주제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 물어본다.. 스스로에게...당신은 어떤 느낌을 가졌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가끔 지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책에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기도 한다. 가끔은 저자의 말에 공감하면서, 그 글을 인용해본다. 한편으로는 그가 말했던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어느덧 당신은 그렇게 거기에 차차 묻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직 은퇴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가끔은 교외의 전원주택에 개인 서재를 만들어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그럴 때마다, 무엇인가 관심있는 주제를 연구하는 아마추어 연구자가 되는 것은 어떤가 상상해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퍼즐을 맞추듯이 무엇인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 왠지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고대사에 대한 개인적인 아련한 기억들이 많다. 전공수업에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시는 교수님이 계셨던 기억도 나고, 상대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적은 고대사는 진실을 찾아 떠나는 탐정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역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으로 단숨에 읽어내려간 이 책을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지만, 일찍이 절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찾기도 힘들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이렇게 여기에 조금의 내용이나마 소개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스럽다.

임나의 역사와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고, 심심치않게 텔레비젼 다큐멘터리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저자가 말한 대로 역사를 해석한다는 것은 현대의 시각을 통한 재조명이기 때문에 특히 한일고대사와 같이 사료가 부족하며 해석이 엇갈리는 경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책은 무척 친절하다. 저자는 우리에게 현대의 시점이 아니라, 당시의 동양적 질서를 먼저 이해할 것을 주문하며, 또한 중요한 사료인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에 대해서 객관적인 자세를 요구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만 임나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복원이 가능할 수 있으며, 저자는 임나를 임나 이전 - 임나의 탄생 - 임나의 변화 - 임나의 소멸 이라는 4단계로 나누고 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다르게 소국연맹의 단계에서 끝까지 통합된 왕국을 이루지 못한 한계를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야는 풍부한 철 자원을 가지고 있었고, 금관가야가 있던 김해는 교역의 관문역할을 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유독 왜는 신라와 잦은 분쟁이 있었는데, 이는 왜의 주요 교역루트가 가야를 통하고 있기 때문에 가야가 분쟁에 말려든다면, 왜의 무역에도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가야에 적대세력인 신라와의 분쟁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왜구의 침입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전면적인 침공이라고 할 수 없다. 함락되어 왜병에게 장기간 정렴된 성은 기록에도 고고학적으로도 없다. 전력에 자신이 없던 왜병들이 주로 구사했던 작전은 변경을 침범해서 백성을 잡아가는 것이었다. 즉, 신라의 패권장악으로 타격을 받은 왜가 귀찮게 굴기는 했지만 문제가 될 만한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4세기 경, 북방에 강력한 고구려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백제-가야-왜가 연결되는 대항세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의 대치상황 가운데 배후를 안정케 하기 위한 백제의 남방진출은 이후 벌어지는 한, 일 양국의 고대사에서 벌어지는 거의 문든 사건의 연결고리가 된다. 왜는 신라로 인해서 대륙과의 교역이 차단 당했고, 백제는 정복활동에 왜의 협조를 얻는다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을 수 있다. 왜가 백제의 가야정복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는 대신 백제는 왜의 최대 현안인 교역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백제는 마한 잔여세력이나 가야제국을 쉽게 자신의 세력권에 흡수할 수 있었다. 임나의 탄생 기원도 이러한 백제의 점령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백제의 가야 경영에 있어서, 여러 소국으로 이루어진 가야 지역의 한계성은 백제에게도 역시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백제는 기존의 연맹체를 확대, 강화하여 백제 주도체제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임나는 바로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졌다. 가야와 임나는 비슷하게 쓴 경우가 많으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임나에는 임나집사 같이 임나 자체에 소속되어 있는 요원이 있지만 가야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 자체에 소속된 요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일종의 정치적 조직이었다는 의미이다. 임나는 자체적인 필요성 보다는 백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구조는 독특한 형태를 지닌다. 첫째 가야제국과는 이질적인 일본부가 임나에 끼어 있다. 둘째 임나가 가야제국의 연맹체임에도 불구하고 궁긍적으로 임나를 통제하는 세력은 백제이다. 임나 일본부란 임나에 파견된 왜의 대표부로 보면 되며, 임나에 파견된 왜의 요원은 임나국사로 불렀다.

지역의 패권이 백제에 넘어가면서, 자신의 세력권에 있던 가야가지 이탈하여 백제측에 가담했다. 왜까지 백제가 주도하는 동맹체에 가담해버리면서 신라는 국제적으로 고립된다. 이렇게 해서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동맹을 맺게 된다. 고구려 - 신라 동맹과 백제 - 가야 - 왜 동맹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임나는 신라의 요청을 받고 출동한 고구려 5만 대군에 의하여 붕괴된다. 광개토대왕의 임나가라 정벌은 단순한 정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 백제 세력의 충돌에 신라, 가야, 왜 등 주변세력이 모두 말려 들게 되어 그 결과 백제 - 가야 - 왜의 동맹체제가 붕괴되는 붕괴점이 되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 군사적 원조를 받으면서 반대급부로 인질을 제공했다. 실제로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인질은 대립세력간에 상호안전을 보증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복속, 강화, 결호와 같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활용된다. 인질을 보낸다는 게 항상 복속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에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 즉 나제동맹의 결성을 통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게 된다. 이로 인해 왜는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왜가 나제동맹 성립 후에도 빈번하게 신라를 침공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와 열전을 치르느냐 가야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재기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임나가 대가야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난 이후 임나의 성격변화가 나타난다. 자체정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대가야가 임나의 맹주로 본격적으로 대외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제-신라의 상호원조와 백제의 재기에 의해 한반도 남부에서의 고구려의 영향력이 크게 쇠퇴했고, 이것이 임나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대가야는 혼인동맹을 통하여 신라와의 동맹을 바랬으나, 신라 역시 임나를 버렸다. 임나는 다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대가야의 정책이 실패하자, 안라가 나서기 시작했다. 대립과 분쟁을 회피하는 외교에 승부를 걸었다. 그러나 백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안라로 쳐들어가 아라의 대외활동을 봉쇄시켜 버렸다.

신라의 무력시위와 백제의 압력 사이에서 고민하던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은 신라에 귀순했다. 신라는 주변의 작은 국가를 정복하면 곧바로 신라의 한 지방을 의미하는 군현으로 편입했다. 반면 백제는 정치, 문화적으로 이질감을 느끼는 지역, 특히 임나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자치를 허용했다. 임나를 만든 당사자이면서도 백제가 임나에 소속되 나라들에게 반감을 얻은 이유는 간접통치의 한계 때문이다. 간접통치에서 얻어갈 것은 다 얻어 가면서도, 지역의 안보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위협을 막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백제의 하위직 관리인 군령 성주를 백제는 파견했다. 임나의 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가 내놓은 수습책은 임나재건이었다. 임나부흥이라는 식으로도 썼던 이 계획의 표면적인 명분은 임나를 강력하게 재편하자는 것이다. 이 계획의 기본골격은 4세기 근초고왕대에 성립했던 백제 - 가야 - 왜 동맹체제를 재건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근초고왕 때처럼 가야제국에 왜까지 임나에 묶어놓고 마음대로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주변의 모두가 달가워 하지 않는 계획이건만 백제의 성왕은 밀어 붙였다. 안라와 일본부는 서로 협조해서 백제의 계획을 방해했고 신라와의 협조를 모색했다.

백제의 최대 위협은 고구려였고, 신라 - 임나 - 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이유도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고구려를 물리치려고 했던 것이다. 백제는 임나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 한강하류 지역의 6개군을 점령했다. 한강유역은 중국과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하류 지역을 기습해서 빼앗아 버렸다. 성왕은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했으나, 어이없게도 신라 하급장교에 포로로 잡혀 죽는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관산성 전투는 백제군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 이후 백제의 전략적 목표는 신라와 공방전을 벌이는 횟수가 늘어나게 된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임나는 본격적으로 자립을 위한 행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신라 측에서는 임나를 믿지도 않았고 임나 같은 것은 유지시켜 줄 생각도 없었다. 신라는 임나를 완전히 해체하길 원했다. 그리고 대가야를 정복한다. 대가야의 멸먕에서 시작된 임나의 소멸은 신라의 배신행위였다. 백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임나는 신라의 힘을 빌리거나 묵시적인 지원을 받아야 했다. 신라는 지원에 대한 언질을 주어 대가야가 백제 쪽에 신경을 돌리게 한 후 기습한 것이다. 신라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워낙 반백제적 정서가 강했기 때문에 임나 소속국은 신라에 흡수되는 방향을 택한 것 같다. 이로써 임나는 영원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희진 교수 (1963 ~ ) 한국정신문화원 한국학 대학원 한국학과 석사,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