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속 양반의 한평생
저: 허인욱
출판사: 돌베개
출판일: 2010년 09월
일본 동북지방 대지진으로 일본 출장을 취소한 이후, 나는 대지진과 쓰나미로 초토화가 된 동일본의 처참한 모습을 텔레비젼 뉴스에서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뉴스 기자의 안타까운 탄식이 섞인 말처럼 슬퍼하며 추스릴 시간도 없이,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누출까지 발생했다. 극도의 평정심과 질서를 지키는 일본인 조차,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인내하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일본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그리고 이 대재난에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구출되기를 빈다. 한편으로는 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보여준 우리의 성숙한 모습을 보면서, 점차 이성적으로 변신하는 우리 사회의 건전성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책과는 관계없는 사설을 너무 많이 늘어 놓은 것 같다. 근래에는 Essay에는 거의 글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일에 바쁘게 쫓기다 보니, 책 소개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일본 지진으로 인해서 바쁜 일상이지만, 꾸준히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아마도 약간의 강박관념일 지도 모른다. 이번에 읽은 책은 허인욱씨의 '옛 그림 속 양반의 한평생'이라는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인 허인욱 교수가 조선시대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조선시대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다시 조선의 풍속화를 모티브로 자료를 보강하여 출간한 것이 이 책이다. 저자가 조선의 일반 대중을 그 대상으로 하여 책을 저술하고 싶었지만, 사실 역사상 대중의 삶을 재구성할 만한 자료들이 충분히 남아 있지는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저자는 비교적 잘 알려진 조선시대의 실질적인 주도층인 '양반'을 대상으로 하여 그 인생을 재구성하였다. 양반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들에 대한 자료가 비교적 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평생을 주제로 한 일생도는 한 사람의 출생에서 성장, 죽음을 아우르는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아들의 출생은 가문의 대를 이은다는 의미로 하여 그 뜻이 남달랐다. 아직까지 남은 이문건이 손자 이수봉의 출생에 감격하여 남긴 글을 읽어보면, 조선시대 대를 이을 아들의 출생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알 수 있다. 아이의 출생은 축복이었지만, 당시의 유아사망률은 아주 높았다. 따라서 아이가 태어나 1년을 무사히 넘기면, 부모는 돌상을 차려 아이의 장수와 복을 빌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기초 교육을 맡은 것은 서당이었다. 서당의 원초는 고구려의 경당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만, 기록 상으로 그 실체가 나오는 것은 성종 3년의 기록이다. 서당의 종류는 그 운영실태에 따라서 달랐는데, 김구 선생의 경우처럼,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부모들이 비용을 대고 훈장을 초빙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유력 가문에서 훈장을 부르고 자식 이외의 친척 등의 아이들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대체적으로 일정한 틀은 없었으나, 훈장의 처우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교육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양반은 관직으로 등용되기 위함이었고, 서민들은 소장 작성과 같은 현실적인 목적때문이었다.
조선시대 혼례는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혼례는 유교의 예에 따라 행해졌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그 절차가 생략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시대에도 재혼을 보면, 양반가 아녀자는 재혼을 하기는 힘들었지만, 일반 대중의 경우는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과거급제를 통하여 관리로 등용되는 것은 조선시대에 있어서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다. 우반 김씨 김홍원이 18세에 진사시에 붙고 3년 뒤 다시 문과 초시에 붙자, 그의 할아버지인 김재와 아버지 김경순은 크게 기뻐하여 노비를 나눠주고, 재산을 나눠주는 분재문서를 남겼다. 그 내용을 보면 김홍원의 가문에서 그의 급제를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고, 또 조선시대 부정한 방법을 써서라도 합격하고자 하는 풍조가 왜 생겼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책에서는 다시 관직생활의 모습, 궤장연, 회갑연, 장례를 풍속화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양반의 일생을 풍속화와 함께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이 책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생활의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인 것이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현재 서구 문명의 세례를 받고 있다고 스스로를 착각하지만, 우리가 서구와 영원히 같아질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몇 천년의 시차를 가지고 계속 되어 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존재가 없어질 때까지는 계속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으리라는 것이다. 가볍게 흥미로운 풍속화를 보면서 양반의 생활상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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