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저: 안대회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0년 01월
비오는 소리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심각하고 어려운 책보다는 쉬운 책이 나쁘지는 않을 터이다. 책의 제목을 읽는 순간에, 난 얼마 전에 뉴스에서 보도한 기사가 생각이 났다. 조선왕조 정조의 비밀편지, 정적이라고 생각한 심환지에게 보낸 이 비밀스러운 편지를 통해서, 우리가 모르던 인간 정조 그리고 그의 통치기술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이러한 어찰첩의 발견, 그리고 기초적인 해석작업과 후속 연구가 차근히 진행된 증거라는 것을 알았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에게도 조선왕조의 통치기법을 매우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찰은 임금이 쓴 편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금이 직접 쓴 글씨는 어필이라고 한다. 임금이 직접 지은 글은 어제라고 한다. 임금이 글을 지어 친필로 쓰면, 어제어필이 된다. 이뿐 아니라 세자나 세손이 쓴 글씨는 예필, 직접 지은 글은 예제, 직접 쓴 편지는 예찰이라고 한다.정조어찰첩은 편지의 수신자였던 심환지의 가문이 계속 보관하고 있다가, 1970년대초에 어떠한 계기로 인하여 현재의 개인 소장자에게 전해졌던 것 같다. 이 편지들은 심환지라는 노론 벽파의 영수에게 씌여진 것으로 대략 정조 말년 4년간 297통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이 정조어찰의 주된 기능은 민감한 정치사안과 인사 등과 같은 내용을 다룬 밀찰이었다. 하지만 정조의 계속적인 파기명령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남았다.
조선시대 사대부 사이에서는 간찰이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국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친족과 대신의 안부를 묻거나 국정을 수행하는 방편의 하나로 국왕도 서찰을 주고 받았다. 정조가 정치적 의미를 지닌 어찰을 신하에게 보내기 이전에 이미 효종과 사도세자가 같은 기능을 지닌 편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어찰 외에 친족에 보낸 어찰이 있다. 어쨌든 조선왕조 국왕 가운데 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은 정조였다. 정조는 공개적인 논의와는 별도로 편지를 사적통로로 삼아 대신들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정조는 밀찰을 통해서, 정치적 비중이 높은 신하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추진하는 일을 성공시켰다.
심환지는 언론과 관료의 감찰을 담당하는 부서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준엄하고 격렬한 주장을 펼쳐, 노론 벽파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그가 정조에게 인정받아 정계의 핵심 요직을 맡기 시작한 것은 환갑을 넘긴 1792년 이후다. 사림청론을 주도한 심환지는 강한 성품의 소유자로 보인다. 벽파는 대체로 국왕의 노선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국왕을 견제하면서 국정의 주요 파트너로서의 위상을 세웠다. 어쨌든 심환지는 공식적 절차는 절차대로 진행하고, 그와는 별도로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행동과 의견을 조율했다.
어찰첩에 실린 편지는 비공개를 전제로 한 비밀편지이다. 따라서 은밀한 정치행위를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막후에서 여론을 유리한 방향으로 형성시키고, 상소를 올리거나 중지하도록 조정하는 일이다. 상소는 신하가 국왕에게 의견을 개진하는 행위인 동시에 여론을 형성하고 정국의 방향을 흔들기도 하는 매우 중요한 정치 행위이다. 그런데 비밀편지에는 이런 상소가 사대부의 자발적 의도만이 아니라 국왕의 의도대로 작성되거나 중단되는 정조시대 정치의 특수한 정황이 흔하게 등장한다. 정조는 심환지를 조정하여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거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정조는 특별히 노론벽파와 심환지에게 정국 현안을 처리하면서 적당한 타협이나 부드러운 화합보다는 선명하게 모서리를 드러내어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요구했다. 노론 벽파의 당파적 성격을 그렇게 세워나감으로써 다른 당파를 견제하는 효과를 보려 한 듯 하다.
정조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신료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에 편지를 활용했다. 대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정치적이지만, 신료의 환심을 사고, 그들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정서적 도구였다. 어찰이 정치문건이자 비밀편지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심각하고 무거운 정치적 현안을 주로 했으면서 어찰 전체를 심각하게 몰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주 많은 편지가 의문을 나타내는 耶를 흔히 사용하여 상대방의 의견을 묻는 투이다. 한편으로 어찰첩에 보이는 정조의 성격은 다혈질적이고, 흥분을 잘하며, 조급했으며, 거친 언사를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고관을 비롯한 후대에 명성이 자자한 학자들이 정조의 입에서는 질타와 욕설의 대상으로 바꿘다. 측근으로 보필한 서영보에 대해서도 '이 사람은 그저 염량세태만 볼 뿐이다.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했다.
정조어찰은 형식과 문체, 내용이 독특한데, 매우 유려한 한문으로 의사를 표시하기도 하고, 이두문자를 구사하면서 우리 문장을 한자로 바꿔놓은 수준의 글까지 다양하다. 급하게 쓰느라고 미처 문체를 돌볼 겨를이 없는 정황을 보이는 편지도 적지 않다. 어휘의 구사에서도 전아한 말에서부터 속된 표현까지 다양하게 구사했다. 정조의 편지는 한편 대화하는 듯한 구어체 문장에 가까운 것들이 있어 아주 간결하지만 생각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의 중흥기를 이끈 정조이며, 우리에게는 성군의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서에서 인용한 '정치가 정조'의 내용처럼, 정조는 진실한 선비의 전형이라기 보다는 지지세력조차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기만과 독단을 자주 사용했으며, 자신의 국정운영 방침에 반대하는 벽파 집권세력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공격 대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위협하곤 했다. 아마도 세계정치사에서도 어찰을 정치도구로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은 유일한 예가 아닐까? 유능하고 노련한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정조의 모습을 다시 재구성하게 된다.
King Jeongjo (1752~1800) was the 22nd ruler of the Joseon Dynasty of Korea. He made various attempts to reform and improve the nation of Joseon. He was preceded by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1724–1776) and succeeded by his son King Sunjo (r. 1800–1834). He is widely regarded 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and visionary rulers of Joseon along with King Se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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