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사회
Lord of Light
저자: 로저 젤라즈니
역자: 김상훈
출판사: 행복한책읽기
출판일: 2006년 04월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연말의 송년회 모임으로 분주하게 지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내년도 사업계획을 세우고, 자료를 만들고 정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다. 영업전략회의를 통해서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바쁜 날의 연속인 것이다. 그래서 책읽는 속도도 무척이나 느려졌고, 전철 안에서의 독서는 근래 약간 힘들어졌다. 읽고 있는 책이 만약에 그렇게 재미가 없었다면, 피곤함을 이유로 잠을 자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첫 페이지부터 SF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 '신들의 사회'는 나를 무척이나 아주 정열적으로 열광시켰다. 내가 몇번이나 그 매력을 이야기했었던 사이버펑크의 대작 '뉴로맨서', Military SF의 대표작 '영원한 전쟁' 그리고 '스타십 트루퍼스' 그리고 너무나 사실적이었던 '라마와의 랑데부'... 내가 SF소설을 그저 하나의 장르로만 단순하게 생각했던 나에게 SF소설 그 나름의 수많은 장르가 있음을 알게 해주었고, 각 하부장르의 이 대작들은 나를 근래 너무나 행복하게 했다. 뉴웨이브 SF의 거장, 로저 젤라즈니...그리고 그의 대표작, '신들의 사회'...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고서 꾸준히 서평을 올린 지가 벌써 2년이 되었는데, (다분히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100권째 책으로 '신들의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 나름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나에게 로저 젤라즈니의 이 책은 SF소설이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는 무한한 매력이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근래에 내가 이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한 책은 없었다.)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른바, 1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지구로부터의 방문자들은 지구형 행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이 행성에 정착하게 되는데, 첨단 기술문명의 배경을 가지고 있던 이들 1세대들은 자신들의 후손들을 행성에 퍼트리면서, 동시에 1세대들은 이들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공고히한다. 이러한 지배구조는 기술문명과는 대립적일 것 같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즉, 1세대를 비롯한 이들은 육체에서 육체로의 전생(혹은 환생)이 가능해지면서 몇십세기를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들은 또한 이른바 '속성'과 '상'을 유전자 조작 및 과학기술을 통해서 획득하게 되면서, 神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 신들은 힌두교의 신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 위계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들의 지배체제는 지상에 사는 인간들로 하여금, 엄격한 카스트 제도를 도입하게 하고, 카르마체제를 바탕으로 전생의 기회를 제공함에 따라서 깨뜨릴 수 없어 보이는 확고한 지배구조를 창출해낸다.
신들은 지상의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억압하며, 자신들의 과학적 성과와 성취를 독점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른바 '촉진주의'가 자라나게 된다. '촉진주의'는 인간에 대한 신의 과학독점을 반대하고 이를 인간에게 널리 전파한다는 사상이다. 싯다르타, 정각자, 마하사마트만, 구속자, 붓다, 마이트레야, 칼킨 등으로 불리우는 샘은 이러한 촉진주의자로 하늘에 대항하게 된다.
로저 젤라즈니가 탁월한 것은 그가 신화와 SF를 접목하면서도 그것이 전혀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전개된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름도 생소한 많은 신의 이름들이 언급되고 있고, 단순히 이러한 신들의 이름만이 차용된 것이 아니라, 바로 힌두교 혹은 불교의 그 철학적 의미 자체가 책에 녹아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본서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들이 한편으로는 SF소설의 모티브이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어려운 철학적 상징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본서의 핵심은 역시 '신권주의'와 '촉진주의'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어떠한 순기능을 담당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것이 만든 지배구조는 타락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종교는 과학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다. 즉, 종교가 비합리적이고 허술한 논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합리적인 과학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니까) 본서에서 신들이 인간들의 과학발전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행동을 거듭하는 것이 이러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주인공 샘이 힌두교의 바탕을 둔 신들의 지배구조에 대항하기 위해서 불교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다른 종교였기 때문일까? 불교가 실질적으로 후세에 오면서 일종의 종교적 색채를 띈 것은 사실이지만, 싯다르타가 대오각성하여 그 설법을 퍼뜨렸을 때도 과연 종교였을까? 싯다르타 자신이 사후에 자신을 숭배하여 신으로 대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는 말과 같이, 초기불교는 종교가 아니었다. 주인공 샘이 설파한 불교는 오히려 힌두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불합리하고 미신적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2007.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