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日淸戰爭
저: 후지무라 미치오
역: 허남린
출판사: 소화
출판일: 1997년
지난 금요일에 구입한 4권의 책 중 마지막 책이다. 주말에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를 않고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역사전공을 한 까닭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 관련의 책을 읽으면 단숨에 읽어나가고는 하는 편이다. 오늘도 오전에 이유경 씨의 책을 다 읽고서, 출퇴근 길에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청일전쟁'을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책은 무척이나 길고 여러 외교문서라든지 자료를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또 한가지는 일본어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긴 것 같은 번역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다.
하지만, 청일전쟁은 우리와도 무척이나 연관이 많은 일대 사건이었고, 이 전쟁을 바라보는 일본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도 사실일 듯 하다. 청일전쟁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 시작을 알렸던 이 청일전쟁의 모습과 성격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주제이고, 현대의 일본인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단서이기도 할 것 같다.
사실 전쟁의 경과와 상세한 내용을 여기서 거론한다는 것은 너무 길고, 소설의 내용을 열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략할까 한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많지만.. 어쨌든 전쟁의 성격과 향후 일본의 제국주의 단초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 같으며, 그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책의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청일전쟁은 10년 후의 러일전쟁에 비하여 그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일본의 군국주의와 군사적 천황제 이데올로기을 확립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 전쟁은 일본의 군사전략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해상전에서는 함대전 결전과 거포전략이, 육상전에서는 보급과 방역체계의 재고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일본군의 전장에서의 잔악행위가 이때부터 정부의 묵인 하에 시작되었던 것이고, 일본패전까지 계속되었다. 어쨌든 청일전쟁은 일본의 군사체제와 군사적 천황제를 확립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은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을 촉진시켰고 이는 동북아의 현상유지를 원하는 영, 러의 정책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은 극동에서의 세력확장에 나선 러시아에 대한 방위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 영일동맹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비록 요동반도의 획득에는 실패했으나, 대만을 얻고 중국의 각 지역에 조계를 얻어 대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최대 관심은 조선에 대해서는 열강의 압력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후일의 러일전쟁의 여지를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일전쟁은 메이지 유신 이래, 최대의 과제라 할 수 있는 국가독립의 목적을 아시아 국가들과의 전쟁과 억압의 수단으로 이루어내었다. 서양과의 대등성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귀속을 최종적으로 귀착하여 고유영역을 확정할 수 있었다. 여기에 일본주의는 등장하게 된다. 이는 천황제 관료를 선두에 두고, 아시아 인접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적 실천'을 강행하는 특수 일본적 이데올로기였다. 또한, 청일전쟁은 그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격으로 인하여, 한국과 중국에서의 민족운동의 시작을 알리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아시아 민족운동에 대한 억압은 당연히 청일전쟁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본서의 내용을 그 의의들을 중심으로 하여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았다. 청일전쟁은 저자가 말한 대로 근대일본을 이해하는 데 무척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막부 후기, 상업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후발주자로서 일본 자본주의는 당연히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를 제국주의적 실천을 통해서 보충했고 그것은 그후 일본의 패망까지 계속된 일본 제국주의의 패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파멸의 길임을 깨닫는 데는 일본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으며, 결국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을 소진한 채 사라져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膝村道生, 1929~ 日本近代史學者
Li Hongzhang, Marquis Suyi of the First Class, GCVO, (February 15, 1823 – November 7, 1901) was a Chinese general who ended several major rebellions, and a leading statesman of the late Qing Empire. He served in important positions of the Imperial Court, once holding the office of the Viceroy of Zhili.
He was best known in the west for his diplomatic negotiation skills. Since 1894 First Sino-Japanese War, Li had become a literary symbol for China's embarrassments in the late Qing Dynasty. His image in China remains largely controversial, with most criticizing his lack of political insight and his failure to win a single external military campaign against foreign powers, but praising his role as a pioneer of industrial and military modernization in Late Qing, his diplomatic skills and his internal military campaigns against the Taiping Rebellion.
Prince Itō Hirobumi (伊藤 博文, Itō Hirobumi, 16 October 1841–26 October 1909, also called Hirofumi/Hakubun and Shunsuke in his youth) was a Japanese statesman, Resident-General of Korea, four time Prime Minister of Japan (the 1st, 5th, 7th and 10th) and genrō. Itō was assassinated by An Jung-geun, a Korean nationalist who was against the Annexation of Korea by the Japanese Empire. Ironically, there is an argument that Itō's death resulted in the acceleration of the final stage of the colonization pro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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