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시장 : 일상다반사, 소소함의 미학, 시장 엿보기
저 : 기분좋은 OX
출판사 : 시드페이퍼
발행일 : 2010년 05월
내 대학생 시절에는 삐삐로 시작해서 시티폰, PCS폰, 휴대폰으로 넘어가는 복잡한 사회 변화를 겪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에 요즘 학생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리포트를 전부 글로 직접 써서 작성했었다. 486 컴퓨터가 간혹 있었지만, 난 그 당시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할 줄도 몰랐다. 제대를 하고 돌아오니, '스타 크래프트'가 국민게임이 되어 있었고 후배들은 게임방에서 밤을 보냈다. 대학 1~2학년 때 청춘 타령하면서 술 마시던 것은 군대 제대하고 나니, 이미 제철이 지난 낭만처럼 비춰졌다.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는 그 시절, 아날로그의 시대에서 디지털의 시대로 광속도로 넘어온 것 같다. 거의 모든 것이 바꿔고, 새로운 물건들이 나의 구매욕을 자극한다. 어디를 가든 나를 계속 유혹한다. 하지만 그래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책이었다. 순전히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종이책을 읽는다는 아날로그적 행위는 여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는 눈의 피로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바꿔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세월이 흘러도 느리게 나이가 드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느리게 가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은데... 어쨌든 아날로그는 키치적 감수성을 사정없이 자극하는 것 같다. 가끔 홍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 뭐랄까. 묘사하기 힘든 그런 거? 뭐 어쨌든 나는 그 아날로그적 감수성에 흠뻑 취하고 싶어서 '한국의 시장'이라는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비닐 포장이 되어 있으니 궁금증은 커졌다. 그리고 나는 5명의 B형 여자분들이 만든 이 아기자기한 책을 흥미로운 시선을 가지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주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경기도, 서울로 대별하여 사진과 함께 곁들인 책은 그녀들의 에세이집이랄까. 각 시장에 대한 이야기의 빛깔은 제 각각 달랐다. (글은 글쎄 뭐랄까. 쓰는 사람의 매력이랄까. 느낌이랄까. 아닌가 음.. 아무튼 무슨 어휘를 써야 될 지는 모르겠지만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가 있다.)
아무튼 마치 여자친구와 함께 시장에 놀러가는 기분으로 (책 쓰신 저자님들 기분 나빠하지는 마시길...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사진과 이야기를 보고 읽으니 내가 시장 한가운데 있는 듯 하다. 제주 민속5일장의 알록달록한 작업복, 밀집모자를 둘러보며, 오메기떡을 사들고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한다. 동문시장에서는 감귤 파는 아저씨가 천혜향 하나를 까서 먹어보라고 하고, 유명하다는 호떡도 사먹으러 가야지. 전라도 벌교의 시장에서는 유명하다는 꼬막을 한 망 사들고, 1박2일에서 나왔던 것 같은 벌교 꼬막 정식을 먹으러 함께 갈 것이다. 외가가 있었던 병천아우내장터도 들러보고, 1934년 조귀금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호두과자를 사러 가야 될 것 같다. 지금은 전철까지 연결되었지만, 내 어린시절 병천까지의 길을 비포장도로였다. 고속버스로 천안터미널에 도착하면, 부모님은 호두과자를 하나 사주셨었다. 그 호두과자를 입에 물고 덜거덕 거리는 이일반버스 타고 병천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강원도 북평장에 들어서니,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은 딸기떡에 눈에 들어오고 풀빵도 있다. 이런 완전 식도락. 주문진 수산시장에서는 저녁에 맥주와 함께 먹을 건어물을 사고 있을 내가 상상된다. 시간이 된다면, 박이추 할아버지의 '보헤미안'에서 드립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도 부릴 만 하다. 부산 깡통시장을 지나 보수동 헌책 골목으로 달려가면, 누군가와 함께 했을 추억을 가진 헌 책들이 나를 기다릴 것이다. 조금은 낡았지만, 어쩌면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귀한 책을 발견할 수도 있다. 보물찾기처럼 아마도 난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를 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은 수다스러운 친구와 함께 아날로그의 냄새가 나는 시장을 둘러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지금은 사라져가는... 그리고 솔직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되는 재래 시장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이번 여름에는 한국의 시장으로 휴가를 떠나보고 싶어졌다. (아니, 사실은 그 근처의 여행지를 더 가고 싶긴 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나도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어 사람 냄새나는 복잡한 시장 한복판을 이리저리 걸어 보고 싶다. 그녀들이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들려준 것 처럼, 나도 사진을 찍고, 새로운 이야기를 덧칠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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