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책무
역 : 강주헌
출판사 :황소걸음
발행일 : 2005년 07월08일
거친 장마비가 잠깐 숨을 고르는 사이 어느새 여름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한가롭게 책을 읽을 시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 하는 고민도 있는 하루. 몸은 지치고 사고하는 것도 피곤하다고 생각된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근래에 읽은 책을 보니 무엇인가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정의롭게 변화할 수 있는 인간 의지에 대한 낙관이 더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해봤다. 하지만 구조적 프레임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한계는 명백해a보인다. 그래서 무엇인가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꿈을 의탁하고 함께 꿈을 꾸는 지도 모른다. 내 자신의 지적 수준 그리고 그에 파생되는 따뜻함이 얼마나 되는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항상 변명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같다. 가끔은 스스로를 보면서 안타깝다. 동정해서가 아니라 진실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체념을 해서 일지도 모른다.
진부할 것 같은 노암 촘스키의 '지식인의 책무'를 읽게 된 계기는 책을 소개하는 신문서평을 통해서 였다. 그러나 1995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다보니, 지금의 상황에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와 얼마나맞을 것인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의 구조적 상황이 1995년 이후 어떠한 혁명적 변화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책이 가지는 근본적인 질문과 방향은 시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퇴색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물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이 실제로 들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었을 때 나는 이 얇은 두께의 작은 책이 가지는 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항상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노엄 촘스키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가 버트란트 러셀 Bertrand Russell을 존경했는 지 잘 알 수 있다.) 이 작은 책은 1995년 1월 노암 촘스키가 오스트레일리아를 1주일 간 방문하면서 가진 강연의 내용을 보완 정리하여 새롭게 쓴 것이다.
촘스키는 도덕적 행위자로서 지식인이 갖는 책무는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지식인 계급의 기본적인 실천원리가 이 기초적인 도덕률조차 거부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형태로 전개되었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와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의 제노사이드를 예로 들며, 소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서구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동티모르를 소외시켰으며 무관심했는 지 보여준다. 서구 지식인의 인식의 틀이 빠진 자기 검열의 모순을 보여준다. 촘스키는 우리가 속한 학교와 언론계와 공동체에서 우리의 관심사와 행동에 대해 숨김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변화가 있을 때 진정으로 우리가 문명 세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결국 지식인이 가지는 소위 책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사회가 보다 정의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스스로 지속적인 정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촘스키는 비전과 목표를 이렇게 정의한다. '비전이란 우리가 현재 하는 일에 활력을 북돋워주는 미래 사회, 즉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어할 사회를 뜻한다. 한편 목표는 능력 범위 내에 있는 과제를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멀리 있어 어렴풋한 비전을 향해서, 과제로 선택한 목표를 어떤 식으로 추구한다.' 우리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비전을 좀더 크게 가져야 된다. 오늘날의 지배사상은 인도주의적 관점과 매우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19세기 중반의 일명 '새로운 시대정신'과 비슷하다. 즉, '돈을 벌어라! 너만을 생각하라!'라는 시대정신이었으며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노동계 언론을 통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전달했다. 하지만, 민간기업과 공권력 앞에 이것은 무너졌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인간의 존엄성도 보호받지 못하고 '임금 노예'로 전락했다. 공공의 감시와 민중의 감시를 받지 않는 민간 독재자들에게 힘이 집중되면서 민주주의와 시장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촘스키는 우리가 결국 어떤 길을 가야 되느냐의 당위성은 결코 변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노엄 촘스키의 담론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지배계급에서는 좌파, 우파, 중도파 등의 분류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계급적 구조을 공고히 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지배계급이 왜 그렇게도 미국을 찬양하는 지 이해가 될 만하다. 일종의 벤치마킹일까? 사회구조의 불합리함을 깨고 공정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행동하는 지식인이 지금 이 시대에는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권력구조에 영합한 천박한 지식인이 양산되고 있는 이 시대, 노엄 촘스키는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마지막 실천적 지식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낙관주의자가 되어,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실천할 수 있는 지적 토대를 함께 만들어가야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지식인에게만 주어진 책무이겠는가.
Avram Noam Chomsky (born December 7, 1928) is an American professor and public intellectual known for his work in linguistics, political activism, and social criticism. Sometimes called "the father of modern linguistics", Chomsky is also a major figure in analytic philosophy and one of the founders of the field of cognitive science. He is a laureate professor of linguistics at the University of Arizona and an institute professor emeritus at the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 Among the most cited living authors, Chomsky has written more than 150 books on topics such as linguistics, war, and politics. In addition to his work in linguistics, since the 1960s, Chomsky has been an influential voice on the American left as a consistent critic of U.S. foreign policy, contemporary capitalism, and corporate influence on political institutions and the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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