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에 대한 옹호 : 믿음의 폭력성을 치유하기 위한 '의심의 계보학'
In Praise of Doubt: How to Have Convictions Without Becoming a Fanatic (2009)
저: 피터 버거, 안톤 지더벨트
역: 함규진
출판사: 산책자
출판일: 2010년 07월
도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때, 가지고 간 코트는 출장기간 동안 계속 필요 없는 존재였다. 남방에 가까운 홍콩의 날씨가 더운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고야와 도쿄의 날씨는 말하자면 우리의 가을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다. 30여분 지체된 후 도착한 김포공항을 나서려고 했을 때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돌았다. 다시 주섬주섬 가방에 넣어두었던 코트를 입었다. 2시간 정도의 비행거리, 가까운 나라지만 날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 났다.
짧은 기간동안 여러 곳을 가야 되었던 탓에 비행기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았고, 책은 필수였다. 흥미로운 제목의 책, ‘의심에 대한 옹호’를 선택했을 때, 얇은 책 두께를 보고서 금방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니,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책에 기대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의 의미를 다른 측면에서 본다는 것이 그리고 그 의미를 느낀다는 것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이성’에 대한 믿음은 나에게는 종교인들이 가지는 신앙심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과학주의의 얼굴을 하고, 결국에는 종교와 다름 없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 밖에 없다. 마치 스탈린의 ‘실패한 신’처럼. 하지만 이성주의와 무신론의 열렬한 신자인 내가 선택할 답안지는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계몽주의 철학이 경험과학으로 탈바꿈하면서, 19세기 사람들은 이성으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성은 종교를 박멸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를 보면, 복음주의 개신교와 이슬람의 부흥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따라서 근대성이 반드시 세속화를 의미하지 않으며, 다원성(plurality)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인 도시화, 정보의 폭발, 인지오염(cognitive contamination) 등은 다원화를 증폭했다. 저자가 말하듯 ‘운명에서 선택으로’
독일 사회학자 아르놀트 겔렌은 선택이 가능한 삶의 영역을 전경(foreground), 선택이 이미 정해져 있는 영역을 배경(background)라고 부른다. 그런데 근대성은 배경을 크게 축소시키고 전경을 크게 확대시킨다. 달리 표현하면, 근대성은 탈제도화를 부른다. 겔렌은 이런 과정을 주어화(subjectivization)이라고 불렀다. 근대성은 선택의 여지를 넓혀주지만 그런 선택의 대상이 꼭 세속적인 것만은 아니며 실제로는 종교도 곧잘 선택된다. 다원화는 반드시 종교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되, 종교에 대한 접근방식을 바꾼다. 다원화는 기성 종교에 큰 위기를 초래하지만, 현대사회는 그런 위기와 더불어 살고, 받들여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성은 다원화하고 탈제도화 한다는 것은 상대화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상대화는 뭔가 절대적이라 믿던 믿음이 약화되고, 심한 경우 소멸되는 과정이며 한편으로 관용을 촉구한다. 상대화는 변증법적으로 진행된다.그런 상대화는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면 재빨리 새로운 절대주의로 탈바꿈한다. 거대한 해방으로 경험된 상대화가 이제는 거대한 구속이 되어 버리고 새로운 절대성을 찾아나선다. 이제 모색되는 해방은 상대성의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이며, 현대적 삶이 제시하는 수많은 선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근대성은 전경을 비약적으로 확대시키고 그에 따른 선택의 괴로움도 확대시킨다. 그러나 상대주의가 니할리즘으로 흐르면서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있다는 점이 있다.
근본주의는 현대적 현상으로 미국에서는 어떤 반동적인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전통주의와는 크게 다른 현상이다. 전통주의는 전통을 당연시하는 태도이며, 근본주의는 그런 당연함이 흔들리거나 상실되었을 때 출현한다. 근본주의의 첫 번째 형태는 재정복(reconguista) 이다. 근대성에 따른 상대화의 힘이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며 이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즉 전체주의 국가를 세우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재정복 계획은 달성하기 어렵다. 다른 형태는 ‘하위문화’ 또는 ‘종파적’ 근본주의이다. 이러한 하위문화가 증대되면 사회의 응집성이 떨어지고 그 사회는 발칸화된다. 따라서 일종의 중용이 필요하다.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중간점을. 그리고 상대주의의 의심을 건전하게 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Peter Ludwig Berger (born March 23, 1929) is an Austrian-born American sociologist and Lutheran theologian well known for his work, co-authored with Thomas Luckmann, 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New York, 1966).
Anton Cornelis Zijderveld (Malang (Nederlans-Indie), 21 november 1937) is een Nederlands socioloog en emeritus hoogleraar. Hij was van 1988 tot 2009 een prominent lid en partij-ideoloog van het Christen-Democratisch Appel (C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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