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soocut28 2025. 5. 13. 15:09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 : 영화와 광고로 본 문화의 두 얼굴 
저 : 김선희

출판사 : 풀빛 
발행일 : 2011년 05월20일 

11월이 되어도 날씨는 화창한 가을과 같은 느낌이랄까. 주말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었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 같다. 아마도 밤이 되면 비가 내리고 그 이후에는 추위가 몰려올 지도 모를 일. 요즘 내 자신은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기쁘기도 하고 동질감을 느끼기고 하며 실망하기도 화를 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미지의 대륙을 처음 여행하는 것과 같은 설레임과 두근거림이 있다. 사람의 깊이라는 것이 사적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에는 아무리 진정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의심받을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나 누구에게도 질타받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의 평정이나 담백함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우연히 집어든 책, 김선희의 '팝콘을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에서 내가 원했던 것은 아마도 무엇인가 잊어버리고 싶은 복잡함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에 가볍게 생각했던 이 책이 제시하는 담론에 빠져 들었다. 김선희가 제시하는 철학 이야기는 부제와 같이 영화와 광고를 모티브로 해서 진행되지만, 여기서는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를 바탕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 소개하고 싶어진다. 
정보가 유력한 자원이 되며 정보를 처리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가치가 창출되는 '정보사회 (information society)'는 우리 삶의 조건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산업구조 및 노동의 성격을 바꾸었으면 인간관계 및 소통양식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의 기계적 합리성은 획일화와 기계화를 가져왔으며 더욱 강력한 통제와 감시를 가져다 주었다. 김선희는 감시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으며, 현재의 감시는 독재자의 권력이 아니라 대중문화의 권력으로 나타난다고 본다. 이 감시의 목적은 정치적 사찰과 통제가 아니라 상업적으로 추구되는 쾌락과 욕망이 벌어다 주는 돈이다.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상업화된 관음이 우리 자신을 타인에 대한 감시자로 만든다. 결과적으로 감시하는 자와 감시받는 자 사이의 권력 문제라는 점에서 국가 기관에 의한 감시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고가 명품의 소비자는 여기에 덧씌운 성공이라는 이미지에 돈을 지불하고 그 이미지를 구매하는 것과 같다. 장 보드리야드 (Jean Baudrillard)는 상품이 아니라 상품의 기호를 소비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특정한 제품의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을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차이를 만들고자 한다. 베블런 효과 (Veblen effect)는 가격이 고가로 책정되어야 도리어 소비자의 허영심이 자극되어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현상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가운데 광고와 잡지는 삶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준다. 광고는 특정한 욕구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해서 일종의 신화로 만든다. 소비자는 명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이 주체가 되었다고 착각한다. 결국 경제적 능력을 개인의 삶을 가르는 기준이나 문화적 수준의 척도로 평가하는 태도는 우리가 경계해야 된다. 
사회이동 (social mobility)는 그 사회가 얼마나 개방되어 있는 지를 알려주는 지표이다. 급격한 산업화를 거친 한국, 일본, 중국, 대만에서 재벌 이야기가 사랑받는 것은 개인의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회적 벽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복권과 경마사업과 같은 한탕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원인이 아닐까. 이러한 사업이 정부가 공익기금을 조성하기 위해서 시행하는 것이지만, 복지를 위해서 라면 체계적인 지원책을 국가적으로 마련해야만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회색쇼크에서 다루었던 고령화를 살펴본 것과 같이 평균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더라도 삶의 질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경제적으로 무력한 노년만 연장되어 간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단순히 인구비율의 변화가 아니라 생산인구의 감소와 노인부양을 위한 사회적 비용의 증가 등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고령화는 개인이 마련해야 하는 노후자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준비하고 대비해야 되는 국가적, 사회적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많은 학자가 20세기가 소득의 재분배가 이루어졌던 시대라면, 21세기는 일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삶의 대비는 삶의 태도와 실천 그리고 사회적 뒷받침에서 비롯될 수 있다.  (회색쇼크 http://soocut.blog.me/10121651539)
근대 이전에는 가족은 하나의 독립된 단위라기보다는 친족이나 마을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단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자본주의는 사회 구성원들을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임금 노동자로 바꾸어 놓았다. 핵가족이라는 가족 형태와 어린이라는 특수한 존재는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전세계가 서양을 중심으로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믿고 있는 정상적인 가족이라는 관념이 허구일 수 있다. 한국에서는 혈연 가족 외의 사회적 관계까지 가족 관계와 정서를 도입해 가족과 유사한 정서적 공동체를 만들려고 한다. 따라서 점차 가족은 사회화되고 사회는 가족화된다. 그러나 가족 관념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소수집단에 속한 개인들은 주변에 몰리고 있는데, 개방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연대된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이 인정되는 사회일 수록 해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권력이나 권위를 경계한다. 개인주의의 입장에서 사회란 개인들의 집합체를 명목상 이름 붙인 것 뿐이다. 개인주의의 다른 쪽에는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일 뿐이며 더 중요한 것은 유기적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보는 공동체 주의가 있다. 공동체 주의에서 개인은 사회에 의해서만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에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충돌할 때 공동선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본다. 최근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인기를 끌었었는데, 그 역시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http://soocut.blog.me/10099895703)
일전에 시골교사로 일하는 저자가 쓴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국의 교육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한 것처럼 교육이 부의 재생산에 기여한다는 문제가 그 핵심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Puerre Bourdieu)는 문화자분 (cultural capital)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체계는 경제적 자본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부모의 경제력이 곧 자녀의 성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기러기 가족은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성공에 대한 강박이 삶의 큰 원칙과 세부를 모두 지배하게 된 결과로 나타난 기형적 현상이다. 문화자본이 경제력으로 환원되고 경제력이 다시 문화적 자본으로 구축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순환과 세습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 http://soocut.blog.me/10115029385)
우리에게는 수없이 많은 타자의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다. 대중매체를 통한 시각적 간접 경험은 우리에게 경험없는 기억을 만들어내고 이는 우리 안에서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타자들을 어떤 위치에 배치해 놓을 지 결정하는 기준역할을 한다. 우리가 타자들을 우리 방식으로 이미지화하듯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에 의해 왜곡된 방식으로 비춰진다. 우리 사회에서는 서구 제국주의에서 유래한 인종주의가 재생산되어 이미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잡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형성한다. 각각의 문화를 그대로 인정하자는 문화 상대성을 주장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열악한 타자는 오리엔탈리즘 시선으로 바로보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김선희는 타자에 대한 관용과 이해는 타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종주의의 재생산 http://soocut.blog.me/10000874650)
'근대'는 유럽이 특정시대에 이룬 역사적 결과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를 처음 이룬 서구가 자신들의 방식을 인류 전체에 강요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당대 지식인들은 근대와 서양을 동일시해서 추종하는 지적오류에 빠졌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없이 추진된 개화는 서구의 모방에 불과했다. 덧붙여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에 따라 과거의 전통은 단절을 강요당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서구의 제국주의를 모방했고, 대한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서구 제국의 무관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단순히 일본만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간단하게 이 책을 요약해보았는데, 내용 상 생략하고 넘어간 주제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여기에서 다룬 주제들은 과거 몇 년 동안 내 자신도 고민했던 것들이다. 국내 교육의 문제점, 사회 정의, 근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선택, 고령화가 그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든지 읽으면 가볍게 시작해서 무겁게 끝날 것 같다.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