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에콜로지카

soocut28 2025. 5. 13. 14:59

에콜로지카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ECOLOGICA

저 : 앙드레 고르

역 : 정혜용, 임희근 

출판사 : 생각의나무 

발행일 : 2008년 11월26일

 

2백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세계를 움직이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매김한 자본주의는 이미 그 한계에 봉착한 듯 보인다. 그 한계가 비록 명확하지만 어쨌든 월가의 탐욕을 규탄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시위가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자본주의와 밀착한 세계화의 망령은 모든 일반 서민들의 삶을 뿌리채 흔들고 있다. 세계화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견해는 몇 년 전부터 계속 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양산한 조악하고 천박한 이론의 배경을 도외시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나의 지적 한계는 뚜렷한 것 같다. 앙드레 고르의 글을 처음 읽은 것이지만, 그의 글 속에서 나는 매우 많은 내용에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한계 또한 뚜렷했다. 

우리 자신은 사회의 거대 기계가 우리 자신에게 담당하도록 했던 역할과 기능을 스스로와 혼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거대 기계의 생산과 재생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동조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앙드레 고르는 이러한 구조에서 진정한 주체는 사회적 배치의 자동화된 논리라고 본다. 거대 기계의 발전과 유지는 소비가 개별화되고 사적인 것이 됨으로써 자본의 이익에 굴복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이미 이러한 지배 논리의 구조를 가진 자본주의가 퇴조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굴레를 벗어날 조건을 획득한 것일 지도 모른다. 

생산성이 증가한다면, 그것이 이익의 양이 줄어들 수 있도록 더욱 증가해야 된다. 생산성의 경주는 이렇게 시작되고 가속되며 사용 인원은 줄어들고 월급 수준과 전체 액수는 감소한다. 이러한 체계는 점점 내적 한계에 봉착하게되는데 그것은 생산과 생산에 대한 투자가 더 이상 상당한 수익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축척된 자본의 점점 많은 부분이 금융자본의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윤 및 성장 예견의 자본화는 점점 빚을 늘어나게 하며 허구적 부가가치들은 은행에서 재순환되면서 유동성 경제를 부풀린다. 따라서 미국은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거품이 꺼지고 전 세계적 신용체계는 붕괴 위험에 처하며 극심한 불황의 위협을 받는다. 투자를 비난하고 금융천국을 나무라고 금융산업의 불투명성과 규제결핍을 탓해봐야 소용없다. 이는 자본주의가 재생불능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탈성장은 살아남으려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평창과 지배는 자본주의가 1세기에 걸쳐, 생산, 소비 양쪽에 모두에 힘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혁명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정보화의 목적은 처음 생산단가 절감이었으며, 이에 대응한 상품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상품이 시장법칙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므로 생산물의 상업적 가치는 효용보다는 그 비물밀적 품질이 좌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혁신은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기술혁신은 지대의 원천이 되는 희소성을 창출하는 수단이며 경쟁상품을 젖히고 휠신 높은 가격을 쟁취하는 수단이다. 지대는 이윤과 성격상 다른데, 지대는 가치의 총합을 증가시키지는 않는다. 지대가 이윤보다 중요한 목표가 되면 경쟁은 혁신능력과 속도에 달려 있다. 따라서 회사는 디자인의 독창성, 마케팅 참신성, 개성화 및 폐기의 가속화를 통해서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는 낭비적인 소비문화를 퍼뜨리지 않을 수 없다. 앙드레 고르는 이를 반사회적 사회화에 모든 것을 거는 문화라고 평한다. 

지식과 콘셉트의 사유재산화가 가능했으며 고정자본의 구성요소였지만, 비물질적 콘덴츠는 아주 저렴한 가격에 무한하게 복제될 수 있게 되자 상황이 바꿔었다. 지식경제학은 상품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비물질적 차원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시대에는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다는 문제에 부딪친다. 이는 보편적인 공동자산이 될 수 밖에 없다. 생산의 주요한 힘과 지대에서 취하는 이익의 주요한 힘이 공공영역으로 떨어지고 무상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퇴장은 자본이 소비에 대해 행사하는 장악력으로부터 또 생산수단의 독점으로부터 우리가 해방된다는 사실이다. 이 퇴장은 생산주체와 소비주체의 단일성이 회복됨을 뜻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필요 및 그 총족 양식의 규정에 있어서 자율성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근대 생산수단의 박탈을 통해 노동자와 생산물이 분리되었으며, 기계화는 획일화된 노동을 조장하고 노동이 정량적으로 환산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전문 과학기술은 자본의 축척을 가능케 했다. 자본은 최대 수익성과 생산 최적화를 지향했으며 생산 자본 증가의 방식은 소비자의 욕망과 필요를 조작하여 낭비일으키는 소비문화를 잉태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 제한을 통한 생태양립적 산업문명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인다. 생태사회학의 근본적 의미는 모든 이에게 한편으로 덜 일하고 덜 보시하는 것, 또 한편으로는 좀 더 많은 자율성과 실존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 사이에 상관관계를 정치적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앙드레 고르는 2007년 오랫동안 병간호를 했던 아내 도린과 함께 동반 자살을 함으로써 생을 떠났다. 이전에는 그의 이름이나 저작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우연하게 읽었던 에콜로지카에서 나는 앙드레 고르가 자본주의로 말미암은 병폐적인 소비문화를 비판하고 보다 덜 소비하고 덜 일하는 인간본연의 자연스러움을 찾을 수 있는 생태정치학을 지향했다는 사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아쉬운 점을 찾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러한 자본주의의 병폐와 인간 본성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은 서구 제국주의가 일으켰던 것이며, 그것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선진국의 입장에서 앙드레 고르의 주장은 수긍하기 쉬울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개발도상국과 아프리카 빈국에게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 덜 일하고 덜 소비하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쉽게 답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이 가증스러운 자본주의가 파멸적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끝은 인류 전체가 그 내적 한계에 봉착했을 때라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Andre Gorz (1923 – 2007), pen name of Gerard Horst, born Gerhard Hirsch, also known by his pen name Michel Bosquet, was an Austrian and French social philosopher. Also a journalist, he co-founded Le Nouvel Observateur weekly in 1964. A supporter of Jean-Paul Sartre's existentialist version of Marxism after World War Two, in the aftermath of the May '68 student riots, he became more concerned with political ecology. In the 1960s and 1970s, he was a main theorist in the New Left movement. His central theme was wage labour issues such as liberation from work, just distribution of work, social alienation, and Guaranteed basic inc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