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아웅산수찌와 버마 군부

soocut28 2025. 5. 13. 10:06

아웅산수찌와 버마 군부 
45년 자유 투쟁의 역사
AUNG SAN SUU KYI AND BURMA'S STRUGGLE FOR DEMOCRACY
저 : Lintner, Bertil

역 : 이희영
출판사 : 아시아네트워크 
발행일 : 2007년 11월07일 

미얀마로 출장을 간 것이 벌써 작년의 일이다. 잘 알고 지내던 일본인 트레이더가 동반 출장을 제시해서 태국을 거쳐 가게된 곳. 나에게는 그저 오래된 군사독재국가 그리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찌 여사가 있는 황량한 땅으로 기억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미얀마라는 혹은 버마라는 이 변방의 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새로운 비지니스를 할 수 있다는 갈망 뿐이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현지 업체의 차량에 올라타 차창을 통해 바라본 랑곤의 모습은 가난에 찌든 모습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듯 느껴졌다. Traders Hotel의 Bar에서 스카치 한 잔을 마시며, 내가 이 나라에 대해서 깊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가난하고 낙후한 나라, 황금의 땅이라는 '버마'에 대해서 무척 흥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정문태 기자는 아웅산 수찌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곧 버마 현대정치사를 제대로 읽는 지름길이며 이를 위해서는 성인의 덧칠이 된 아웅산 수찌, 우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버틸 린트너는 버마 전문가로 오랫동안 일했던 경험이 있으므로 이러한 역할을 위한 적임자로 생각되었던 것 같다. 
1930 ~ 1931년 불교 승려 우 야쪼가 주도한 봉기에 영향을 받은 급진적 학생운동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아웅산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급진적 학생운동에 참여한다. 초기의 민족주의 운동에는 버마족이 대다수였으며 소수민족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국경지대 소수민족은 전혀 다른 정치적, 민족적 세계에 살고 있었으며 자신들만의 독립운동을 발전시켰다. 아웅산은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향했으나,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샤먼에 도착했다. 이로 인해 일본에 가게 된 아웅산 일행은 일본 군부가 국민당 정권을 지원하는 구미의 버마로드를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들을 지원하면서,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한편, 일본이 아웅산을 비롯한 좌파 일행을 신뢰하지 않고 네윈을 비롯한 우파들도 포함시키면서 여기서 분란의 있게 되지만, 이들 30명에 달하는 사람들은 추후에 '30인 동지'로 불리운다. 
이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1942년 일본은 버마독립군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한 목적을 간파한 민족주의자들은 1945년 3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결국 일본은 패망하게 된다. 일본군과 전쟁에서 싸운 주력은 영국군과 소수민족 게릴라였지만, 버마인들에게 아웅산의 버마독립군이 더욱 부각되었고 아웅산은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947년 버마의 독립협정이 아웅산과 영국사이에 서명되었다. 하지만 아웅산은 곧 정적에게 암살 당한다. 이것은 복잡한 버마의 정세에서 소수민족과 버마족을 아우르는 인물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장차 커다란 혼란이 야기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우 누는 아웅산과 같은 카리스마가 부족했을 수 밖에 없다. 
1962년 독립 후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실험을 계속 시행하던 버마는 네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 쿠테타에 무너지게 된다. 무혈 쿠테타로 알려진 그 배후에는 군부의 잔인한 학살이 있었다. 영국 식민지 이전에 버마는 강력하고 통일한 정치체를 가진 권위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까친족이나 친족이 사는 지역은 버마 왕조가 한번도 자신의 영토로 삼지 못했던 지역이었다. 지금의 버마는 영국 식민지의 잔재 위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버마의 분열상의 원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1988년 8월 8일 파업으로 촉발된 민주화 봉기는 거의 모든 버마의 도시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어머니인 킨찌를 위해서 28년만에 귀국한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찌는 대중 앞에서 민주화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버마인의 지지와 믿음을 한번에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민주화 시위에는 구심점이 될만한 지도세력이 부재했다. 혼란과 약탈이 진행되면서, 군부는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움직였다. 다시 학살이 자행되었고 일부 학생들은 국경지대로 도망가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세웠다. 군부는 해산된 네윈 하의 BSPP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을 NUP(민족통일당)으로 재편했으며, 이에 대해서 민주화 세력은 NLD(민족민주동맹)을 결성했다. 아웅산 수찌는 민주화 운동의 실질적 중추였다. 
1989년 규율, 책임, 비폭력 투쟁을 통한 민주화 시위라는 방식이 등장했다. 1988년 봉기에 비해서 더 세련되고 잘 조직된 저항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아웅산 수찌는 군부를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가택연금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립은 그녀의 고집스러운 신념을 강화하고 약점을 강화시켰다. 야수와 같은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성녀의 이미지, 여성보살의 이미지로 발전된 아웅산 수찌의 개인숭배는 건전한 버마의 민주화에 있어 커다란 약점이다. 민주화와 화합을 주장하는 그녀의 이야기 뒤에는 민주주의를 위한 어떠한 구체적 청사진도 없으며, 버마의 커다란 혼란을 야기하는 국경지대 소수민족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 마저 혼란스럽게 한다. 어쩌면 버마 민주화에 있어서 아웅산 수찌 이외에 중추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약점으로 생각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버틸 린트너는 아웅산 수찌의 한계를 인정하고, 88세대 (1988년 민주화 시위의 주역)가 향후 버마의 민주화를 주도하리라는 기대를 한다. 이미 NLD와 아웅산 수찌가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한 군부를 축출할 혀실적 힘과 대안이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아시아 국가가 민주화를 이루어냈던 것처럼, 버마에서도 이들 세대가 독립 이후 갈 길을 잃은 버마의 방향을 잡아 줄 지 모른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아웅산 수찌는 그 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녀의 말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를 타락시키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권력을 잃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타락하게 되고,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폭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타락한다.'



 

Bertil Lintner (born 1953) is a Swedish journalist, author and strategic consultant who has been writing about Asia for nearly four decades. He was formerly the Burma (Myanmar) correspondent of the now defunct Far Eastern Economic Review, and Asia correspondent for the Swedish daily Svenska Dagbladet and Denmark's Politiken. He currently works as a correspondent for Asia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