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soocut28 2025. 5. 12. 15:51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저 : 권혁범

출판사 : 생각의나무

발행일 : 2009년 06월

 

그 동안 보통 일주일에 4 ~ 5 차례 술을 마시고는 했는데, 책을 몇 권 주문하고 이번 주는 술을 줄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민족주의는 죄악인가'라는 도발적 제목의 책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민족주의에 대해서 잘 정리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우리는 민족주의가 근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자세한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사실이다. 문득 나는 주변에 만연한 민족주의의 과잉을 목격한다. 또 한편으로는 근현대사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미친 광대한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소개된 민족주의 담론은 다소 정리가 되지 않은 개념을 체계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의 프레임을 바꿈으로써 보다 좀 더 다른 시선에서 삶을 조망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편, 민족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페미니즘을 함께 고찰할 수 있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생각을 정리할 겸, 조금은 장황하게 책의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한반도 (저자는 이 용어가 대한민국 중심적 단어이기 때문에 '코리아 반도'를 대신 사용했지만, 나는 한반도로 사용한다.)에서 민족의 개념이 생긴 것은 언제일까. 일부 학자들이 이야기를 하듯 우리는 위대한 단군신화 이래로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을까? 흔히 이야기를 하듯이 우리는 순혈의 한국인, 어떤 타종족의 유입도 없었던 피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었던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과 신화를 구별하지 못한 따름이다. 실질적으로 민족은 조선시대 말과 일제시대 초기에 생겨난 개념이었고 의식이었는데, 이는 조선말 신분제 폐지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한 집단적 저항의식이 발흥이 노비, 상민, 양반이라는 계급을 '조선인'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민족은 다른 근대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Nation을 번역해서 들여온 개념에 기초했다. 민족에 대해서는 종족적 민족론과 정치시민적 민족론이 대립한다. 전자는 집단적 공통성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근대에 와서야 생긴 개념이고 그것이 구성원 간의 평등한 정치적 시민적 권리 및 동일성을 기초로 발생한 의식이라고 주장한다. 즉,종족적 (ethnic) 민족의 신화는 민족 정체성에서 개인의 선택이 전혀 없지만, 시민민족론에 의하면 민족 정체성은 선택의 문제고 같은 생각을 가진 개인들과 공유하는 정치적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의 기원과 생성에는 원초론 (primordialism)과 근대론 (modernism)이 대립한다. 앤소니 스미스 (Anthony Smith)는 후자를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한다.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근대적 현상이며, 자본주의, 산업주의, 관료제, 매스커뮤니케이션 및 세속주의란 근대적 상황의 산물이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근대적 접착제로 근대성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어네스트 르낭은 (Ernest Renan)은 실제 과거를 망각하고 역사적 착오를 통해서 민족을 재구성하는 것은 민족의 발명에 근본적 요소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민족형성의 과정이란 곧 국가구성의 과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최소한 국가는 민족에 선행한다고 볼 수 있으며, 종족은 민족주의적 정치에 의해 그 일부 특징이 절대화하여 민족으로 호출된 것이다. 한편 점유하는 혹은 점유하려는 영토의 유무가 종족과 민족을 구분해낸다.

민족이나 민족주의는 왜 생겨난 것인가? 어네스트 겔러는 근대적 산업화에 필요한 대규모의 교육받은 계층을 만들어내려는 필용에 대응해서 발생했다고 본다. 또한 겔러는 민족주의란 근대화 그 자체보다는 그 고르지 못한 확산과 관련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즉, 민족주의 신화가 자본-노동, 지배-피지배 간의 계급 간 갈등을 은폐하고 계급적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데올로기의 일부로 성장했다. 민족을 통하여 통일된 영역에서 상업이 큰 장애물 없이 발전할 수 있었고 봉건적 신분제를 넘어선 평등에 기초하여 누구든지 생산자-소비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근대 초엽 중간계급의 부르주아지는 민족주의의 핵심적 지지자였다. 따라서 민족이 Nation을 의미하고 그것이 한 국가를 열망하거나 유지하려는 집단적 의식이며 정치적 공동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혈통'과 '전통'의 신화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민족, 민족주의, 민족국가를 정리해보자. 민족은 국가의 실제적 잠재적 국경에 연관된 사회정치적 범주이다. 국민도 nation의 번역어이지만 시민권을 기초로 한 개념이라  원래 nation에 가까운 개념이지만 한자어 國民은 국가주의적 뉘앙스가 강하다. 민족, 국민은 근대적 산물 혹은 현상이다. 민족의식 및 민족정체성의 조건은 동질성 확보를 위한 신분제 철폐, 인민주권, 교통, 인쇄술 및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 그리고 보통교육이다. 민족국가는 국어, 국사, 국문학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초역사화한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이나 통일 또는 우월성을 내세우는 사상이나 운동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쇼비니즘이나 인종차별주의로 전화하기 쉽다. 민족, 국민은 국가(state)의 존재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민족주의(nationalism)는 근대 초엽에는 매우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를 가졌고, 민주주의와 상보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진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민족은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 민족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시 하는 것 자체가 인권을 하위적 가치로 끌어내린다. 한편 우리 민족의 강조는 내부 문제를 덮어버리고 지배계급의 특정한 이익을 민족의 번영으로 수용하도록 만든다. 민족주의가 강해지면 계급의식은 그만큼 약화된다. 탈민족적 주체를 민족의 하위단위로 포섭할 때 다중적 주체나 다성성 (multi-vocality)을 억압하는 메커니즘이 된다. 우리는 흔히 민족이란 자연적 동질성의 반영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소수민족 및 종족들을 강제로 통합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배집단의 이해에 맞추어 억압하는 폭력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다.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가 페미니즘과 충돌할 수 있다는 입장이 나온 것은 최근이다. 여성은 보통 덜 애국적이고 더 보편적이므로 탈민족주의와 세계시민주의 (cosmopolitanism)에서 여성이 선도적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중심적 민족주의를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여성은 민족 자체가 되지 못하고 오로지 그것을 상징하는 표지에 머문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무의식적으로 제국주의와 공모하여 여성을 배제, 억압하고 성 착취, 지배를 지속시키는 내부 구조를 은폐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식해야 된다.

진보적 민족주의 담론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하는 데 있어서 한국사회에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 진보적 민족주의는 전통적 진보에 기초하며, 민족을 우선적으로 내세우고 계급은 그 다음에 나머지는 비본질적 혹은 부차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입장을 갖는다. 진보적 민족주의는 물론 퇴행적이고 국수주의적인 민족관에 반대한다. 일차적 목표는 제국주의나 신식민주의에 반대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종적 민족적 차별을 반대한다. 그러면서도 '민중'이나 '계급'중심의 역사관을 보유한다. 저자는 최소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된다고 주장한다. 한편, 아직 민족이라는 범주가 갖는 현실적 영향력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바탕을 둔 세계주의 일지도 모르겠다.

 

권혁범 대전대학교 정치언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