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 저 | 휴머니스트 | 2010년 12월
무신론자인 나에게 있어서 종교는 문명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탐구 대상의 하나이다. 특히, 기독교는 무척이나 많은 질문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현대문명이 서양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 그리고 폴란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언급했던 유동적 위험 중에 속해있다고 보는 현대의 종교갈등을 이해하는데도 많은 시사점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800페이지 이상의 성서만큼 두꺼운 이 책을 읽으면서, 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와 같은 지루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이 장대한 이야기 속에서 나는 행복함을 느꼈다. 저자는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 사용했던 디아트리베(diatribe)라는 수사법으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하였다. 저자가 서문에 이야기했던 대로 신은 종교 안에 머물지 않고 세속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문화적인 것 안에 과감히 침투한다. 따라서 서양문명을 이해하는데 기독교의 신을 이해하는 것은 서양문명을 심층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자, 이제 저자가 나에게 속삭였듯이, 나 역시 함께 여행 길을 떠나고자 한다.
1. 신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에 있어서, 주목하려는 것은 신의 모습이다. 기독교에서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적어도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는 그렇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천지창조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이고 그들에게 신은 영(靈)이다. 신을 보았다는 구약성서의 기록들은 신의 본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과 위엄의 상징을 보았다는 의미일 뿐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인에게 신은 인간을 이상화하거나 그 능력을 극대화한 존재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다. 하지만 고대나 중세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욕정과 죄의 온상이기 때문에 숨기고 가려야 했다. 그리스인이 단순히 육체적 아름다움에만 매혹되었던 것은 아닌데 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급한 ‘이데아(idea)’의 미’ 즉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추구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에서는 감각의 미를, 정신에서는 이데아의 미를 찾아내 조화시키려고 애썼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이란 여인의 얼굴이나 신체와 같은 감각적 대상에서 나오는 게 아니며 이는 단지 매개체일 뿐으로 보았다.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anamnesis)하게 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곧 ‘이데아의 미’에서 나온다고 봤다.
신과 인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신인동형설 (anthropomorphism)이라고 한다. 또 신과 인간이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신인동감설 (anthropopathism)이라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 와서야 신인동형설과 신인동감설에서 벗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신을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라고 규정했다. 축약하면 ‘부동의 운동자 (unmoved prime mover)’ 또는 원동자 (primim movens)’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운동(kinesis)’이라는 말은 장소의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 양적, 실재적 변화를 동시에 의미했다. 풀어보면 자기는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질적, 양적, 실재적, 장소적 변화의 근원이 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우스나 아폴론 같은 유형의 그리스적 신 개념이 처음으로 ‘부동의 운동자’라는 무형의 자연원리로 변한 것이다. 그렇지만 구약성서는 처음부터 신에게서 인간의 형상을 철저하게 지웠다. 그러나 구약에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구절이 있지만, 형상과 모양은 외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본성을 의미한다는 것이 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이다.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과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이 종합된 것이다.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인데,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 받아 존재하는 것이다.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omnipresence)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였고, ‘신은 창조주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부단히 자신의 피조물들과 관계하여 그들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간다.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2. 존재란 무엇인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 칼빈과 함께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신은 ‘있는 자 (Qui est)’ 또는 ‘존재자체 (ipsum esse)’라고 했다. 그는 신이 무엇인지 알려면 ‘신이 어떤 식으로 불러지는지를 고찰해야 한다’고 했다. 구약에서 신을 가리키는 일반 명칭은 ‘엘(El)’이다. 엘에서 엘욘 (Elyon), 엘 샤다이 (El Shaddia), 엘 올람 (El olam), 엘로힘 (Elohim) 등 신을 부르는 많은 이름이 파생되었다. 이 이름들은 인간이 신에게 붙인 이름일 뿐 신이 자신에 대해 밝힌 명칭은 아니다. 신이 자기 이름을 감춘 것은 사실 신에게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이다.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규정된 한정된 ‘존재물’에만 붙일 수 있다. 그런데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한다. 신에게 본질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존재’뿐이다. 아낙시만드로스 (Anaximandros)는 우리가 무규정자, 무한정자로 부른 것을 아페이론 (apeiron), 곧 무한자라 불렀고, 그것이 만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을 형이상학으로 끌어 올려 ‘존재’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였다. 이를 플라톤은 자신의 존재론 체계 안에서 모든 이데아의 근거인 ‘일자(一者, en)’ 또는 ‘선자체’로 정립했고 이를 종교화한 사람이 플로티누스였다.
구약에서 단 한차례 신이 자신이 이름을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ehyeh asher ehyeh)’라고 밝힌 것이 있다. 이는 그리스어로 된 최초의 구약성서(70인 역)에서 ‘나는 있는 자다’라고 번역되었다. 탁월한 번역이나 존재와 존재물이 혼동될 수 있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본의 아니게 스며들어 히브리어 표현의 근본적인 의미를 변질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ehyeh asher ehyeh)’의 핵심 의미는 단순히 ‘나는 있다’ 또는 ‘나는 나로 있다’라는 것이다. 신은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존재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임을 알린 것이다. 성서에서 여호와로 표기되는 ‘야훼(YHWH)’라는 네 철자 이름이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ehyeh asher ehyeh)’와 관련된다. 신은 ‘무엇’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저’ 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
다양한 모든 존재물이 근원적으로 가장 공통요소가 ‘있음’ 곧 그것의 ‘존재’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인 두 주제인 ‘본질’과 ‘존재’ 중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 (ontology)이라고 부는 형이상학(metaphysic)으로 단번에 뛰어들었다. 그가 이해한 존재의 속성은 ‘불변성’이었고, 존재에 대한 인식과 언급만이 진리라고 주장했다.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인식과 존재는 동일하다’라고 주장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분법적 사고는 존재론만이 아니라 인식론과 논리학의 터전을 닦은 시원적 사유였다. 플라톤은 ‘참으로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이데아 뿐이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플라톤에게도 존재인 이데아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이고 존재물에 대한 인식은 진리가 아닌 사견일 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서양문명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데, 플라톤은 불변하는 실체인 존재를 이데아라고 불렀고,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을 확장했다.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개개의 사물 안에는 이데아가 들어 있다. 이 들어있음을 통해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그것의 본질을 물론 있음이라는 존재를 부여받게 되고 이름까지 얻게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는 사물들에 완전히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부분적으로만’ 들어 있다. 그래서 개개의 사물은 이데아처럼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불변하지도 않다. 이런 이유로 이에아론을 ‘분여 (methexis) 이론’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개개의 사물은 그 본질에서 불완전하고 존재에서도 실재성이 적다. 존재만이 진리의 근거이지만, 존재물들도 부분적으로나마 존재를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 더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처럼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불완전하게 있을 뿐이다.
정리하여 ‘존재’라는 말 대신 ‘신’을 넣어 이중적 의미를 생각해보면,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면하며 우주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고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즉,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플라톤의 분여이론을 접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이 곧장 이렇게 사유했다. 이 이론은 현실세계와 가치체계의 다양한 질적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데 그치지 않고, ‘자연의 사다리’와 ‘존재의 사다리’라는 개념으로 발전해서 고대와 중세의 교회제도와 사회제도를 확립하는데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 철학에서 어떤 사물이 더 많은 이데아를 분유해서 갖는다는 점은 그만큼 더 안 변한다는 것, 더 완전하다는 것, 더 단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미지, 사물, 수학적 대상, 이데아 순서로 올라갈수록 더 변함이 없고 완전하며 단일하며, 지식도 예술, 자연과학, 수학, 철학 순서로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이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으로 제공한 피라미드형 층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사다리 (scala naturae)’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자연학으로 들어왔다. 플로티노스는 물질, 영혼, 정신, 일자라는 존재의 계층구조를 구성했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명할 때,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이 자연에서 신까지 아우르는 위계적 질서를 설명할 때 매우 유용했다. 이 같은 사유는 다윈에 의해 ‘진화의 사다리’라는 매우 의미있는 개념으로 연결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신학자들에게는 이 사다리는 초월적 세계로까지 연장된 ‘존재의 계층구조’이다. 그것은 물질세계로부터 비물질세계까지 곧 지상세계에서 천상세계까지 이어진 ‘존재의 대연쇄 (The great Chain of Being)’이다. 자연의 사다리와 존재의 사다리, 둘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플로티노스의 계층적 구조와 함께,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기독교와 함께 ‘자연의 사다리’가 ‘존재의 사다리’로 확장되었고, 이후 서양문명에서는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를 신이 부여한 세계의 본성이자 가치체계로 인식했던 고대와 중세 사람들은 사회적 질서도 그것에 맞춰서 정립했다. 평신도, 사제, 주교, 교황이라는 교회제도, 농노, 기사, 영주, 왕이라는 봉건제도를 구축했다. 이들 제도가 피라미드식 계층구조를 따른다는 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지위나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뜻했다. 요한 칼빈은 자연과 사회 안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존재의 계층적 질서가 신이 정한 진리라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인간이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따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로 보아 소명의식을 주장했다. 소명의식이란 모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세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각각 특정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이 무엇이든 거기에 충실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는 인식이다. 사회계약설이 나오기 전에 서양의 자연법사상 안에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로부터 뻗어나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며 서양문명에 고착된 존재의 대연쇄라는 형이상학이 뿌리깊게 들어 있었다.
플라톤은 플로티노스에 의해 다시 태어났는데, 다분히 종교적 성격을 띄는 일자 형이상학을 세웠다. 즉, 일자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 근거이자 그 모두를 포괄하는 자이다.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무한자 (apeiron)로서 모든 한정되고 규정된 것들의 궁극적 근거가 되지만, 그 자신은 어떤 것에도 포괄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초월자이다. 플로티노스의 세계구조에서 물질세계를 유출시킨 일자, 정신, 영혼은 영원불변 하는 ‘신적존재’이다. 창조와 관련해서 본다면 일자는 창조의 바탕이고, 정신은 창조의 틀이며 영혼은 창조의 원리이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유출된 물질은 부단히 생성되고 소멸된다. 우리는 신적존재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세가지 이론이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야훼를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그대로 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신적 존재인 일자, 정신, 영혼이 신약의 성부, 성자, 성령과 적어도 외형적으로 놀랍도록 맞아떨어졌다. 히브리 선지자들의 이해가 그리스 철학의 사변과 심층적 내용에도 맞아 떨어진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의 존재개념을 알아보자.
히브리어로 ‘존재’를 의미하는 동사는 ‘하야 (hyh or haya)’이다. 이 말도 정지적 개념인 ‘있다’라는 뜻만이 아니라 역동적 개념인 ‘있게 되다(생기다)’ 또는 ‘있게 하다’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존재’는 영원 불변한 것인 동시에 생성, 작용하는 실재이다. 한 개념 안에 존재, 생성, 작용을 다 포함시킨 논리적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은 공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에 비해서 히브리인들은 시간적으로 사유하는 경향이 짙다.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시간화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서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다.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하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 된 현상일 뿐이다. 즉,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다. 아서 러브조이 (A.O. Lovejoy)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이처럼 독특한 사유를 ‘이중적 논법’이라 불렀다. 창조한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본질과 존재를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을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사역이다. 스스로 생성, 작용하는 존재가 아니고야 어떻게 본질과 존재를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가. 자신을 무한한 존재의 장(field)으로 펼쳐 그 안에 피조물을 생성하고 또한 그들에게 부단히 작용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존재, 바로 이것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계시한 신이자, 히브리인들이 하야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신이다.
존재의 장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우주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물이 여기서 생겨나고, 여기서 존재하면 여기서 소멸하는 무한한 신적 근원을 뜻한다. 이는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potential)’이라는 소립자의 장을 떠올린다. 한스 페터 뒤르는 플로티노스의 일자처럼 아직 나뉘지 않은 ‘온전한 무엇’이 먼저 있었고, 그것이 분화해서 하위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들은 물질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갖고 물질이라기보다는 장(field)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비물질적인 소립자의 장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고 지금도 유지되며 매순간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은 우리가 말하는 존재의 장, 곧 신이 아니다. 누군가가 퍼텐셜이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곧 우주와 신이 하나인 범신론(panthesim)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이지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야훼는 세계에 항상 내재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언제나 초월하기 때문이다.
3. 신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는 지식의 논리적 타당성을 따져보자는 것인데, ‘신 증명’ 또는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숱한 논증이다.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가. 이는 지식의 건전성(soundness)을 살펴보자는 것으로 근대 이후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기준이 되었다. 11세기 말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는 (a) 신은 정의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다. (b) 가장 완전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결핍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c) 만일 어떤 것이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한다면, 이는 실제적 존재가 결핍된 것이다. (d) 그러므로 신은 인간의 정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 가우딜로라는 무명의 수도사는 우리의 정신에 존재하는 관념이 무엇이든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반박했다. 이에 안셀무스는 신 개념은 일반 개념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는 이른바 신 개념의 특수성을 내세워 반박했다. (a) 신은 정의상 그 이상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완전한 존재다. (b) 현존(existence in reality)에는 필연적 현존과 우연적 현존이 있다. (c) 필연적 현존은 우연적 현존보다 완전하다. (d) 그러므로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
데카르트는 안셀무스 논증과 유사하게,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의 완전성인 현존을 필요적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100년쯤 지나 독일의 칸트는 안셀무스와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 (der ontoglogische Gottesbeweis)을 2단계로 반박했다. 먼저 ‘개념의 영역’과 ‘현존의 영역’은 다르다. 따라서 가장 완전한 존재의 현존이 개념상 필연적이라고 해도 실제적으로 필연적이지 않다. 현존이란 사실의 문제이므로 경험으로 판단해야지 사고로 증명할 문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칸트가 볼 때 존재론적 증명에는 이처럼 개념의 필연성을 뜻하는 ‘논리적 술어’와 현실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실재적 술어’에 대한 혼동이 있다. 2단계는 칸트는 ‘신은 현존한다’라는 명제를 이 명제를 부정한 모순명제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논증만으로는 그것이 현존을 증명할 수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즉, 삼각형은 세 각을 갖고 있다라는 명제의 모순 명제인 삼각형은 세 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자체적으로 모순을 포함한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검증해보지 않고도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다 칸트는 이를 ‘분석판단’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사과는 빨갛다’는 ‘이 사과가 빨갛지 않다’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종합판단’이라 불렀다. 우선 ‘신은 현존한다’라는 명제의 모순 명제인 ‘신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명제는 종합판단 명제이다. 당연히 논증의 타당성만으로는 그 명제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고 경험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다섯 가지 길 (quinque viis)를 제시했다. 첫 번째 논증에서는 운동 (movere)으로부터 모든 운동의 궁극적 근거로서 제일의 운동자 (premium movens)인 신을 증명했고, 두 번째는 결과의 원인인 능동인 (causa efficiens)으로부터 모든 결과의 궁극적 원인으로서 제일의 능동인 (Prima causa efficiens)인 신을 증명했으며, 세번째로는 우연과 필연 (possibili et necessario) 으로부터 모든 우연적 존재의 궁극적 근거로서 필연적 존재인 신을 증명했고, 네 번째로는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의 단계 (gradibus)로부터 최고의 단계로서 신을 증명했으며 다섯 번째에서는 사물의 목적성으로부터 궁극적 설계자 또는 통치자 (gubernatione rerum)로서 신을 증명했다. (a) 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들이 있다. (b) 그런데 세계의 모든 일반적인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이 때문에 무한소급해 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c) 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경험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한계 지어졌다. 모든 무한소급 (infinite regress)은 논리적으로만 가능하지 존재론적으로는 가능하지 않는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원칙이다.
한편 미국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지적설계 (intelligent design)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살펴보자. 성공회 부주교였던 윌리엄 페일리는 시계 유추 논증을 제시했다. (a) 시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b) 세계는 시계와 유사 (analogy)하다. (c)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지적 설계자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만들어졌다. 그 설계자는 신이다. 이에 대해서 흄은 우연에 의해서도 세계가 형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단순히 추론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은 부질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존 스튜어트 밀은 페일리의 논증은 유부추론 (Analogical Inference)의 형식을 취하는데 유비추론은 전제들이 참인 경우에도 결론이 ‘확률적 참’ 또는 ‘가능적 참’일 뿐 ‘필연적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했다. 페일리의 시계 유추를 비판한 흄, 칸트, 밀 같은 철학자들은 그에 대한 반론은 제기 했지만 자연의 복잡성과 합목적성의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 때 다윈의 진화론이 나왔다.
진화론은 기독교를 향해 ‘자연을 위한 신의 개입은 처음부터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결정적 메시지를 날렸다. 진화론에 의하면 자연의 창조주는 자연선택이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이고 그것에는 아무런 예정된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이전 기독교 안에서 페일리의 논증은 강한 비판을 받았다는 점을 주목하자. 18~19세기 서구에서 유행하던 자연신학은 당시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진실한 신앙을 가진 신학자들이 싸운 가장 위험한 이단적 이론이었다.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기독교를 인간 중심적이고 과학적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라는 개혁신앙의 구호를 따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이성적 계시에서 구하지 않고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에서 구하려는 자연신학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이는 지적설계론을 내세워 창조설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 전통적 교리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신을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가 있다.
안셀무스는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진 존재론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적극 수용했다. 근대에 들어서면 이들 두 사람의 방법론을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계승하는데, 이는 본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적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플라톤에게 진리는 우리가 정신으로만 파악 할 수 있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이다. 한마디로 플라톤은 ‘철학을 하는 신학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하는 과학자’였다. 선험적 인식 능력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론자는 플라톤의 후예다.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자들은 경험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다. 이런 해묵은 논쟁을 종결한 것은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칸트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의 현존에 대한 논증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일종의 오류라고 주장한다. 신은 우리의 감성으로 파악되지 않아서 그에 대한 모든 인식은 단지 공허한, 즉 ‘내용 없는 사고’에 불과하다. 감성을 통해서 경험되는 대상이 현상체 (phaenomenon)이고, 감성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 곧 가상체 (noumenon)이다. 예를 들어 영혼이나 신에 대한 사고가 가상이다. 이런 대상도 사고 될 수 있고 또 사고 되어야 하지만 인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지만 감성이라는 섬 안에 있어야만 안전하다 즉 감성의 한계가 곧 이성의 한계이다. 따라서 감성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사고는 가상이고 오류의 원천이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을 보자, 이율배반은 서로 모순이 되는 두 명제가 진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을 말한다. ‘세계의 원인인 하나인 필연적 존재가 있다.’의 모순 명제인 ‘세계의 원인인 하나의 필연적 존재가 없다’ 역시 경험적 확증과 경험적 반증이 모두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런 명제들은 둘 모두 ‘내용 없는 사고’ 곧 ‘가상’이다. 19세기 중반 신학자들은 칸트를 인간이성의 유한성에 대한 통찰을 확립했다고 칭송했는데 이는 이신론자, 인류교도 자연신학자의 거센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유구하고 무익한 오류들로부터 신학을 지켜주었고 신학은 20세기 신의 현존에 대한 합리적 증명이나 이해보다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우선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론적 발판을 얻었다.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다. 히브리인들에게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논증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근대와 함께 합리적 주장의 영향으로 기독교 내에서도 종교적 경험을 배척하는 세력이 나타났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자연신학자들, 프랑스와 독일의 계몽주의자들이 주장한 이신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경험에 의한 신의 존재증명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종교적 경험의 형태는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 (mystical form of religious experience)와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ordinary forms of religious experience)’로 구분할 수 있다. 신비적 형태의 종교적 경험은 보통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물질적 세상을 잠시 잊게 함으로써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란 어떤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에서 종교적 깊이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성스러운 경험을 말한다. 이는 일종의 사고의 틀이고 삶에 대한 태도인데, 미국의 과학 사학자 토머스 쿤이 정의한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쿤에 의하면 패러다임 (paradigm)이란 본디 그 자체가 신념과 가치체계이자 동시에 문제해결방법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패러다임과 이를 통해 얻은 경험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인식은 일종의 해석인 것이다.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는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는가에 달렸다.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4. 창조론이 왜 ‘고백론’안에 있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에 남긴 위대한 업적은 바로 계시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운 것이다. 신학계의 플라톤이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들은 그 후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카톨릭 신학자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철학에서도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합리론자들은 물론 칸트, 볼프, 헤겔을 포함한 독일 관념론자들도 인간정신의 내부에는 변하지 않는 것(quod incommutabiliter manet)이 있어 여기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과 상기의 힘 (vis memoriae)이 있어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할 수 있다는 것 등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덕을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이 마흣셋에 고백록을 썼는데, 삶의 정점에서 회고록을 쓴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매개로 자기가 맡은 교구의 교인들을 교육할 신앙 간증서 내지 신학 교육서를 썼던 것이다. 그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닫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다. 현대 신학자 파울 틸리히가 신적 경륜을 인간의 차원에서 파악하여 ‘신율 (theonomy)’라는 용어를 만들었는데, 이는 외부권위에 의해 인간의 자율을 전적으로 폐기하는 타율과는 다르다. 신율은 자율을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시킨다. 요컨대 신율은 섭리에 의해 모든 상황과 여건이 성숙되어 초월적으로 실현되는 자율 (autonomy)을 말한다. 그는 히포의 감독이라는 막중한 직위를 맡고 죄 많았던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려 한 게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이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이라는 기독교적 진리를 증언하려고 쓴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의 역사 또한 어떤 우연이나 운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존되며 인도된다고 했다.
5. 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졌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했다. 시간과 더불어 이루어진 창조 (creatio cum tempore)라는 말은 신이 세계를 ‘시간 밖에서’ 창조했다는 의미다.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사물이 없는 곳에서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다. 신은 시간 밖에서는 안식하고 시간 안에서는 활동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현대 천체 물리학이 내세우는 우주론인 빅뱅과 맞아 떨어진다. 오늘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주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하면서 시간과 공간이 펼쳐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규모로 동심원을 그리며 진행된 갑작스럽고 광대한 팽창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팽창이 텅 비어 있었던 어두운 공간을 뭔가가 순식간에 채워나간 것은 아니다. 무에 가까운 특이점 밖에는 공간도 시간도 아무것도 없었고 우주는 그야말로 무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대물리학자들은 대개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이나 ‘양자비약 (quantum Jump)’을 통해 최초의 물질 형식들이 생성된 양자영역’을 무로 설정한다. 양자요동에 의해 무에서 유가 자발적으로 생길 수 있는 것처럼, 빅뱅도 외부에서 가해진 외부적 원인(예컨대 신)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초의 물질이 형성되는 양자 영역’,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은 절대적 무가 아니라는 점이다.
실재하는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구조 사이에 공모 또는 협동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있다고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말하며, 그가 자연과학 지식을 토대로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게 우리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다. 물론 그가 이 같은 우주적 사실들이 곧바로 신의 창조를 증명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우주의 기능에 본질적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우주의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라는 자신의 말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신의 창조에 대한 자연과학 지식이 아니라, 신의 세계초월성이라는 철학적, 신학적 주장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의 세계초월성을 전지전능성과 연결 지어 이해한다. 성서 텍스트의 ‘사실’은 예컨대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존재세계의 사실이다. 즉 창조, 신의 통치, 언약, 중생, 심판, 종말, 부활, 새 세상 등 성서의 언어로 구성된 성서세계에서 그 의미가 결정되고 객관성이 보장되는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이 세계의 언어에 대한 해명은 당연히 자연과학적이거나 역사적 해명과 다들 수 밖에 없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 (language game) 이론을 보자. 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가 구성하는 풍습, 제도, 역사,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사람의 양식이 반영된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언어에 의미를 발생시키는 규칙이라는 의미에서 삶의 양식을 ‘문법’ 또는 ‘논리적 문법’이라고 불렀다.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종교와 과학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지만, 새로운 문법을 익힐 수만 있다면 두 가지 언어놀이가 가능하다.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나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성이 ‘시간의 무한한 확장’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원성이 무시간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이 당신에게 ‘신은 영원하다 (Quod Deus est eternus)’ 라고 말한다면, 이는 신이 시간 안에서 무한히 존재하거나 신이 시간 없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그 말은 단지 신은 시간 밖의 존재, 곧 세계초월적 존재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이다. 플라톤 철학에서 영원한 존재란 자기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전체성 안에서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현존하는 존재 곧 불변하는 실체를 뜻한다. 시간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원에는 과거나 미래도 없고 언제나 자기 동일적 현재만 있기에 영원은 불변하는 실재이며 신과 연결되는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영원이야말로 가장 안정된 존재, 즉 미래에 변모될 것도 없고, 과거에 변화된 것도 없는 그런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은 신인 일자에 속한다.
원형(paradigm)과 이를 본뜬 모상(eikon) 관계를 아는 것은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존재론 전통의 다양한 주장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플로티노스에게 영원은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이고, 시간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이다. 시간 역시 꾸준한 집념으로 영원을 닮으려고 한다. 시간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도록 하는데 우리의 마음이 신에게 이르면 이때는 시간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의 마음이 불완전하기에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시간론 전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구원 방법은 신학에서는 물론 철학과 문학을 비롯해 서양문명에 끼친 영향이 매우 넓고 깊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시간인 영원과 같은 시간, 즉 흘러가 버리거나 사라지지 않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 안에 존재하는 시간을 우리의 마음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시간의 끔찍한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미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하나로 연결시켜 마치 ‘바로 눈앞에 보이듯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는 이런 마음이 가진 능력을 상기의 힘이라고 불렀다.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이 능력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로 무한히 분산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체가 된다. 상기의 힘은 개인적 차원에서든 역사적 차원에서든 모든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리적 시간과 심리적 시간의 가능성을 주었는데, 분산되는 시간과 통일된 시간, 존재물의 시간과 존재의 시간, 세속적 시간과 신적 시간으로 부를 수 있다. 물리적 시간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꾸는 일종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타노이아 (metanoia)’ 즉 회심이다.
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는 주장은 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신플라톤주의자들과 갈라서서 오히려 플라톤에게로 다가가는 심오한 사유이며, 교리적으로는 마니교의 주장을 반박하는데 사용했던 뛰어난 변증이다. 신은 그가 창조하지 않은 질료, 즉 마니교에서 말하는 악하고 추한 질료로부터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물질도 선하며 아름다우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세계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불온전하게 됢, 이것이 타락의 기독교적 의미이고, 다시 온전하게 만듦, 이것이 구원의 기독교적 함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인간과 세계가 불온전하게 될 가능성, 곧 타락할 가능성을 가진 이유는 그것들이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나 신으로부터가 아니라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신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왔다는 성육신 (incarnation)의 계시는 매우 신비롭고 독특하다. 성육신은 유대교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에서도 매우 낯선 기독교 고유의 사유이다.
6.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창조가 태초에 일어난 일회적 역사가 아니라 섭리에 의한 지속적인 보존과 인도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창조에 대한 언급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플라톤은 이데아인 ‘선자체’ 규정하고 선을 자족적 완전성으로 파악했다. 선자체로서의 일자는 언제나 완전하게 자족적이기에 그에게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신은 자기 스스로 충족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의미에서도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일자의 자기초월적 풍요성 때문에 피조물과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그런데 종교 개혁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루터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일반에서는 창조가 ‘피조물과의 친교 (a communion with his creature)’를 위한 것으로 규정되었고, 칼빈 신학과 개혁파 교회 전통에서는 창조의 목적을 ‘신의 영광 (the glory of God)’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창조가 신의 어떤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에 플라톤, 아리스톨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주요 현대신학자도 반대한다.
오늘날 진화론은 아직 완변학 완성을 이루지 않았지만 일종의 종교처럼 신봉되고 있다. 다윈의 후계자들은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통하여 자연, 사회, 문화 그리고 인간을 파악하고 있다. 18세기 인류 사유의 틀은 존재로부터 생성을 향한 전환을 시작했다. 진화라는 개념은 다윈 당시에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칸트, 헤르더, 셀링, 헤겔 등이 나름의 발전가설을 잇달아 주장함으로써 18세기 중반에는 진화론이 서구사회의 지식인들 사이에 하나의 유행이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대중적 성공을 거둔 것은 내포한 유물론적, 실증주의적 경향이 당시 지식인들의 취향과 맞았다는 점이다. 풍부한 사례와 뛰어난 수사학적 기법을 동원한 다윈의 표현 기법이 대중을 매혹시키는데 충분했다. 진화론은 자연은 동식물을 막론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숫자보다 휠씬 많은 자손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손들 간에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결과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변종들이 생겨나고, 그들 가운데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변종은 살아 남지만 그렇지 못한 변종은 자연히 제거되는 자연선택이 일어난다. 다윈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맬서스와 스펜서의 사회학적 개념들로부터 빌려왔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학문적 행위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회진화론 (Social Evolutionism)과 연결되어 엄청난 사회적 불행을 초래하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 용어들은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한 사회진화론과 함께 서구사회도 그렇게 살벌한 공간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허버트 스펜서가 대표하는 사회진화론을 오늘날에는 ‘사회다윈주의 (Social Dawrwinism)’라고도 부르지만, 그 핵심적 교의가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이어서 ‘사회스펜서주의’가 더 적합하다. 생존과 번식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세계의 법칙들이 학문, 예술, 종교와 같은 정신적 가치도 함께 추구하는 인간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불편하다. 그런데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매혹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선 이미 진화론이 열병처럼 번졌고, 일반인도 ‘자연을 따르라’라는 해묵은 구호가 여전히 변치 않는 불문율로 통하고 있었다. 사회다윈주의자는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체제와 손을 잡았고 우파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 사회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로 접어들며 점점 더 과감해지고 노골화된 사회다윈주의자들이 새롭게 지지한 이념이 있는데, 대내적으로는 인종, 계급, 남녀 차별주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였다. 진화론과 우생학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이 같은 주장 속에서 19세기 말에는 점차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세계대전으로 잉태되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특정한 자연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기를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고 인간이 원숭이에게 유래했다는 것도 상식이 되었지만, 기독교인들과 교회는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다윈 자신은 물론이고 헉슬리 같은 다윈주의자들이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과 연결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불가지론을 내세웠다.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에 대적하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는 진화론 외에도 이신론, 인류교, 자유주의 신학, 실증주의, 유물사관 등의 부단한 도전에 지쳐있던 19세기 후반 교회가 진화론에 유화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우주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복잡성이 증가하는 쪽으로 자기조직을 하는 본유적 경향성을 갖고 있었다. 무한자인 신의 사랑을 유한자인 우주가 받아들이려면 ‘진화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카톨릭 신학자 칼 라너가 주장했다. 즉, 신이 진화가 맹목적으로 즉 미결정적 방식으로 이뤄지도록 창조한 것도 바로 이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신학은 주로 기독교로 개종한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정립되었는데,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도 성부는 창조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창조를 하는 이는 성자인데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성부의 영원한 형상들을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차례로 구현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종자적 형상을 실제 형태로 현실화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자연법 (lex naturalis)’라고 한다. 이처럼 창조가 신이 직접 그리고 일시에 실행한 사건이 아니라 신이 창조해서 위임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통해 점차 이뤄졌다는 이론은 중세를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그는 모든 운동은 가능태를 현실태로 바꾸는 현실화이며 영혼이 생물에 내재하는 이 현실화의 원리를 성취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의 4가지 원인 중 하나인 ‘능동인 (causa agents)’들과 함께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능동인은 ‘본래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 또는 ‘제1원인’과 ‘제2원인’으로 나누었다. 신이 창조했다면 모든 것이 필연적이겠지만 신은 제2원인에 위임해서 창조하기도 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 (Quod diuina prouidentia manente multa sunt conigentia)’라는 것이다.
요컨대 창조는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그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어떤 원리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진화원리’ 또한 신이 만들어 지속적 창조를 위임한 ‘현실화 원리’ 내지 ‘자연법’ 또는 ‘영원한 법칙’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신은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이미 기독교가 오래 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 창조의 합목적성과 진화의 맹목적성을 조화시킬 만한 이론을 기독교가 확보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이 무엇인가? 바꿔 말하자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신의 필연적 계획 안에서 진화의 우연성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는 전통적 신학이론이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예지는 같은 범주,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완전한 신에게는 자족이고 불완전한 우리에게는 은총인 창조의 목적은 오직 인간과 세계구원이다. 존재자체 (ipsum esse), 진리자체 (ipsa veritas), 선자체 (ipsa bonitas) 또는 아름다움 자체 (ipsa pulchritudo)인 신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야기이다.
7.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관계가 있나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로고스 (logos)는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섭리 (providentia) 이다. 이 섭리는 세계에는 그 세계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자연법칙으로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으로 작용한다. 모든 인간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자연법이라고도 불렀던 이 도덕법칙에 순응함으로써 덕스럽게 될 수 있다. 신의 법인 ‘자연법’이 인간들의 실정법보다 우선되는 것이 서구에 내려오는 오랜 전통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항상 살아 있어서 왕의 법령이라도” 감히 어길 수 없는 하늘의 법, 자연법이다. 로고스와 자연법이 동일하다는 신념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확고한 교조 가운데 하나였다. 로고스는 또한 인간의 이성이기도 했다. 인간은 로고스를 자기 정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 안에 있는 로고스, 곧 자연법칙과 도덕법칙을 인식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이 생각이었다. 그 이성에 의해 파악되어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의 법칙인 섭리는 인간이 부단히 따라가야 할 복종의 길일 뿐 인간의 삶에 깔려 있는 희망과 절망, 기쁨과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세네카는 이렇듯 섭리를 필연적인 것, 즉 운명 (fatum)으로 생각했고 이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이기도 했다. 섭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분개하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하는 신의 뜻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운명에 복종할 것을 권할 때, 그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슬프고 무섭고 견디기 힘든 운명을 제 스스로 따름으로써 우주의 섭리인 로고스와 합일하면 ‘존재론적 승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신들보다 더 위대해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에 고통을 아예 모르는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세네카는 참된 스토아 철학자는 ‘신들 위의 신 (God above Gods)’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유와 용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오직 스토아 철학적 정신만이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 정신과 당당하게 대립할 수 있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한 인간구원이 신의 은총에 의한 인간구원을 적어도 19세기까지도 부단히 위협했다.
바울과 세네카의 가르침은 매우 닮았는데 바울 또한 인간의 모든 일은 오직 신의 섭리에 의해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며 이에 대해 누구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질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둘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유사성은 스토아 철학의 로고스 이론이 초기 기독교 교의학과 윤리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바울을 기독교에 그리스 철학을 끌어들인 원흉이자 시조로 규정하고 비판한다. 바울에게는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거나 실질적으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용어와 수사학적 표현 양식만 그랬고 내용에서는 구약과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에 닿아 있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세네카의 섭리와 바울의 섭리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은 각각의 섭리를 주관하는 신이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는 차이에서 나온다. 세네카의 신은 비인격적이고 바울의신은 인격적이다.
칼빈은 스토아 철학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인간을 지배하는 초자연적 섭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신의 섭리를 3가지로 분류했다. 일반섭리는 자연의 질서인데 신은 모든 행위의 가장 우선적, 직접적 목적을 남겨 둔 채 자신이 창조할 때 부과한 법칙들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면서 역사한다는 것이다. 특별섭리는 신이 자신의 종을 돕고 악인을 응징하며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벌을 내려 공의의 심판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성령의 내적 작용으로 신은 성령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거듭나게 한다.
8. 신의 인격성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이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란 단순히 신이 피조물들에게 ‘참여와 인도’라는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인 한 신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물의 존재에 ‘이미 그리고 언제나’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이 생성, 작용하는 한, 신은 피조물들의 모든 변화를 ‘이미 그리고 언제나’ 이끌고 있다. 그럼으로써 신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온전하게 한다. 신의 인격성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대응이 곧 기도이다. 기독교인에게 기도란 참여와 인도라는 신의 인격성을 경험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기도를 ‘신과 인간의 대담’으로 규정했다. 신은 자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에만 응답하고 그렇지 않은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섭리의 어의적 의미는 ‘미리 보는 것 (pro-videre)’인데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신이 인간과 교회 그리고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로 해석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가르침을 기도란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합당한 것을 청원하는 것 (petitio decentium a Deo)이라고 표현했다.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 신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도 신이 예지한대로 된다라고 교훈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다스린다라고 가르쳤으며, 칼빈은 모든 사건은 신의 감추어진 뜻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다라고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격적입니다. 신이 인간과 세계의 시작부터 종말까지 그 모든 것에 부단히 참여하고 부단히 인도한다는 뜻에서 인격적이다. 그렇지만 신은 오직 자신의 섭리대로 인간과 세계를 이끌어 간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선을 이룬다. 여기에는 어떤 타협이나 침해도 없다. 이것이 ‘신은 인격적이다’라는 말의 기독교적 의미이다. 따라서 기도로 신의 섭리를 깨닫고 자기체념으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은 욥이나 하박국이나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된다. 그뿐 아니라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구원, 곧 자신마저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을 신이 용납하는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기도를 한다. 이러한 체념, 이러한 자족, 이러한 지혜, 이러한 구원을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인격성이다.
9. 일자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이데아가 모든 존재물의 궁극적 근거인 일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각각의 개별적 사물의 근거인 이데아의 세계 외에 그 이데아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실체를 부득이 설정해야 했다. 그리고 ‘선자체’를 일자이자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확정했다. 그는 선자체를 불변성, 불가지성, 불언명성 그리고 최고의 권능과 위엄을 갖는 가장 완벽한 실재로 정의했다. 플로티노스는 깊은 철학적 통찰력을 지닌 종교인이었다. 플로티노스의 일자에 관한 사유는 기독교 사상 안에서 삼위일체 신의 제일위인 성부로 발전했다. 그가 신적존재로 구분한 일자, 정신, 영혼이 기독교의 성부, 성자, 성령과 맞아떨어졌다.
삼위일체 (Trinitas)와 관련된 논쟁이 많았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위격 (persona)’과 ‘본질 (substantia)’라는 법학 전문용어를 끌어들여 삼위일체라는 용어와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그때부터 ‘신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사유의 언급이 기독교 신학 안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삼위일체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 (tres personae una substantia)’이라는 말은 신이 바깥으로 나타난 위격으로는 셋 (성부, 성자, 성령)이지만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권능에서는 하나라는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모두 취했다. 오리게네스는 신은 존재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고 신의 내적 언어로서 모든 존재의 창조원리이다. 이것이 후일 서방 카톨릭 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이 되었다. 한편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해 아버지만이 자존의 신이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후일 동방정교회에 속하는 오리게네스 좌파의 입장이 되었다.
교회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삼위일체 논쟁은 삼위일체설을 놓고 부딛친 알렉산드리아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오리게네스 우파와 안디옥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오리게네스 좌파의 다툼이었다. 좌파인 아리우스는 아들이 시작이 있었으며 아버지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 또는 조성된 것이라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는 ‘신의 세속화 (kenosis)’를 통한 인간의 신성화 (theosis)라는 동방정교 신학의 중추가 되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아리우스주의는 배격되고 반 아리우스주의가 채택되었다. 이것이 니케아 신조인데 핵심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것, 곧 일자 = 창조주라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동등성 등식이었다. 종교적 측면에서 예수의 신성을 명백히 인정하는 것이었고, 사상사 관점에서는 기독교 신학이 그리스 철학을 비로소 극복한 계기가 되었다.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세 교부 (Three Great Cappadocians)는 가이사랴 감독 바실리우스, 니세수스 감독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를 말한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기존용어의 애매함을 제거하여 삼위일체 개념을 분명히 했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는 언어적 혼란을 정리하여 우시아는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질’로 히포스타시스는 플로티노스적 의미에서 ‘실체’ 곧 ‘본체’로 확정하여 신은 ‘세 본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본질’이라고 명백히 선포했다. 이 새로운 정식을 구축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좌파와 마찬가지로 분명 신플라톤주의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이 정식을 해석하는 데서는 오리게네스 우파의 주장도 무사하지 않고 ‘신적 통일의 통일성’을 부단히 강조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삼위는 본질과 실체 또한 지위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는 삼위는 오직 ‘관계에서만’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나뉘지만 연합해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신의 삼위일체적 본성에서 사랑(성령)에 의한 동등한 사귐과 교제로서의 ‘인간 공동체 원형’을 발견하고 주장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신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영혼 속의 기억, 이해, 의지의 통합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 이른바 ‘심리적 유비’가 자주 거론되나, 그가 삼위일체로부터 인간공동체 원형을 이끌어 낸 사회적 유비 (social analogy)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을 사랑, 선물, 친교로 파악했고, 우리도 성령에 의해 서로 간의 친교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신과도 친교를 이룰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권고했다. 진리는 말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 기독교를 통해 서양문명 안에 잠재되어 부단히 내려오는 이 고귀한 사유를 감안할 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내용을 단순히 사변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10. 유일신은 배타적인가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매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신인데, 신약의 하나님은 달랐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기독교 신학에 끌어들여 구약과 신약, 악의 신과 선의 신이라는 두 영역을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해결하는 방법을 택했다. 기독교가 구약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일신 사상을 계승한 것은 사실이다. 그건 예수와 사도 바울이 직접 나서서 민족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요소를 모두 걷어냈다. 예수와 바울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특수성을 깨뜨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보편주의를 정립하려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가진 유일성은 배타성이 아닌 포괄성이고, 일치를 원하는 사랑이 아닌 조화를 원하는 사랑이다.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배타성과 폭력성은 반신앙적 유산이다.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존재보다 더 큰 범주는 없다.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 것에도 포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신이 존재라면 그는 유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일자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성도 동시에 갖고 있는데 일자성은 무규정성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지만 삼위일체성은 사랑에 의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귐과 교제에서 오는 포괄성과 통일성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유일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면 본질공동체적, 영원동등적이고 몰트만의 표현에 따르면 상호내주적, 상호침투적 사랑이 그 본질이다. 여기에는 서로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통일적인 하나됨을 이루는 이종사랑 (heterologous love)만이 존재할 뿐 그 어떤 배타성이나 폭력성도 침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