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ILL FARES THE LAND (2010)
저: 토니 주트
역: 김일년
출판사: 플래닛(Planet)
출판일: 2011년 02월
근래에 읽은 책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우연히 선택한 이 책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토니 주트를 만나게 되어서 반가운 마음과 먼저 알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읽을 내용을 다시 정리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길게 책을 요약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일은 20세기 진보를 규정짓는 사회 개혁의 핵심 과제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과제에서 등을 돌렸다. 우리는 불평등의 심화를 목격하고 있으며 이러한 격차가 심할 수록 사회문제는 역시 악화일로를 걷는다는 것을 안다. 한편 우리의 도덕적 감성 역시 실제로 타락했다. '자유로운 기업', '민간부분', '효율성', '이윤', '성장' 등을 모토로 내세운 영미식 모델에 대한 칭송은 최근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고 널리 확산되었지만, 이 모델 자체를 엄격히 적용해온 나라는 아일랜드와 영국, 미국에 불과하다.
불황과 파시스트 정권의 억압, 대량학살이 불러온 전쟁으로부터 이끌어낼 교훈은 적지 않았다. 불안정해진 삶은 자유주의의 자신감과 제도를 그 뿌리에서부터 갉아 먹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집단적인 공포의 폭발을 불러왔다. 전후 초창기의 정책 논쟁은 도덕적인 성격을 띄었고,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데 기꺼이 찬성했다. 평등의 확산은 극단적인 정치 세력이 다시 부상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잠재웠던 것이다. 따라서 적절한 부의 재분배와 극심한 양극화의 해소는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전후 대부분이 공유하게 되었다.
공동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다. 세금은 이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는 예인데, 세금은 우리가 선조에게 진 빚을 갚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따라서 세금을 내는 행위는 은연 중에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납세자와 수혜자들 간의 신뢰와 상호 의존 관계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신뢰의 부재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것을 방해한다. 일반적으로 신뢰가 널리 자리 잡은 곳은 상대적으로 작고 동질적인 사회일 가능성이 많지만, 가까운 미래에 미국이 하나의 주요 종족 중심 사회로 재편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20세기 중반 복지 국가는 이기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인종적 동질성과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적은 인구라는 행운을 누려왔다. 복지국가는 대다수 국민이 스스로를 다른 동료 국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곳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신뢰와 협동이 근대 국가의 주춧돌이었으며, 시민들이 서로 신뢰하는 정도가 클수록 국가가 더욱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신뢰와 협동, 누진세, 개입주의적 국가가 1945년 이후 수십년간 서양사회에 남긴 유산은 안정과 번영, 사회 복지, 평등의 확산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책임' 국가가 입으로만 자신들을 대변한다고 말할 뿐 실제로는 국민들의 필요와 욕구에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면서 사회적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이 시기에 스스로를 신좌파(the new left)로 일컫는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좌파는 단순히 자본주의의 부정의에만 항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과 그것의 최종 진화형이라고 할 수 있는 복지국가를 공격했다. 60년대 세대를하나로 뭉치게 한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이는 급진주의적 정치의 파편화와 맥이 닿아 있었다. 마르크스 주의는 서로 상이한 온갖 주장이 모일 수 있게 만든 수사학적 차양에 지나지 않았다.
나르시시즘에 도취한 학생운동, 신좌파 이데올로그, 60년대 대중문화가 보수주의의 귀환을 부채질했다. 이제 우파는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치, 국가, 존경심, 권위, 서양사회의 유산과 문명을 위해 투쟁한다고. 이들은 지나치게 야심찬 국가가 민간 영역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경제적 동맥경화를 일으킨다고 주장하며 이를 해결할만한 과격한 해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해결책이 아니고 문제이고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국가의 역할 역시 다시 한번 조정자 역할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조지프 슘페터, 칼 포퍼, 피터 드러커를 주목하게 된다. 이들 모두 자신의 조국 오스트리이가 전간기에 겪었던 파국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찾아낸 해답은 국가주도의 계획경제, 시당국에 의해 운영되는 서비스, 경제활동의 집산화 등과 같은 좌파의 무익한 정채근 단순히 그 자체의 실패로만 끝나지 않고 곧 바로 반작용으로 이어졌다. 하이에크와 동료들은 유럽의 비극은 좌파의 실패가 초래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나치가 남긴 교훈을 오해함으로써, 혹은 나치가 남긴 교훈을 일부만 선택적으로 적용하여 이들은 전후 세계에서 주변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 영국에저 점증하고 있는 과도한 양극화를 정당화 해주는 수단이 되고 있는 규제 완화와 최소 간섭, 민간부문의 미덕 등과 같은 변명거리들을 제공해 준 최대의 공로자가 되었다.
20세기의 마지막 30년을 장식한 지적흐름은 민영화에 대한 숭배였다. 이윤 동기만으로는 적절히 기능하지 않는 필수 서비스들은 공공의 관리와 통제 하에 있었으나, 이제는 민간 기업의 손으로 다시 넘어가고 있다. 경제이론과 대중적인 신화와는 반대로 민영화는 비효율적이다. 민영화 그 자체는 장기적인 경제 성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민영화는 단지 납세자와 소비자의 부를 새로이 민영화된 기업의 주주들에게 넘겨주는 역진적 부의 분배를 실현했을 뿐이다. 국영기업을 민간 사업자에게 넘김으로써 국가는 고의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방기했다. 이런 식으로 복지국가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극소수의 기업가와 주주들의 이익만을 남긴채 사라져 갔다.
공공부분의 해체가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우리가 다른 동료 시민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공간이 문제다. 왜냐하면 정치는 특정 공간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동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공공장소, 공공재,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격려하기까지 한다면, 오로지 자기 자신에 필요한 것만을 바라보려 하는 젊은이들의 경향을 열렬히 지지한다면, 이 때 우리는 공동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시민의 참여가 줄어드는 현상에 놀랄 필요가 없다. 경제적인 삶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소비자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목표들 중 하나를 선택할 뿐, 이러한 목표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전체를 상상하지 못하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공산주의는 200년간 이어진 급진적 진보에 대한 약속이 이제 공식적으로 사망하였음을 알리는 조조종이었다. 주류 좌파 정치 세력은 현실 세계의 딜레마들에 실질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상실했다. 오랜 시간 좌파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급진주의적 담론이 사라진 자리를 채울 것은 없었다. 남은 것은 정치 뿐이다. 이상이 없는 정치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관리하는 사회적 계산의 형식으로 축소된다. 이것은 또한 보수주의가 살아남기에 충분한 조건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는 좌파에게 재앙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른 경쟁자들과 자신을 구분지을 것이 전무하다. 오늘날 문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이 아니라 고갈되어 버린 그들의 언어에 있다. 현재의 좌파가 처해 있는 처참한 현실이 시사해주듯이 분명한 해답이 없지만,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우리를 통치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방법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순응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던져야 한다. 해방이란 의지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에 충분히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너진 사회 기반 시설뿐만 아니라 허물어진 공적 담론의 복원을 희망할 수 없다. 저항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목표는 정치적 통로를 통해 추구해야 한다. 부(wealth) 그 자체에 대해서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물질적 부의 재분배가 장기적으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사회의 긴장을 완화시키며, 소수의 독점하고 있던 서비스를 모두가 누리게 해준다면, 이러한 사회가 더 낫지 않을까.
Tony Robert Judt FBA (1948 – 2010) was a British historian, essayist, and university professor. He specialized in European history, was the Erich Maria Remarque Professor in European Studies at New York University, and Director of NYU's Erich Maria Remarque Instit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