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
저: 와타나베 히로시
역: 박홍규
출판사: 예문서원
출판일: 2007년 02월
지난 금요일 술자리는 우연히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 수록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모르지만, 일본에 대한 시각과 견해를 나누었다. 생각해보면, 술자리에서 일본 욕하는 일처럼 시간 잘가는 일도 없지 않는가.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어린 시절의 일본은 퇴폐적이지만 (물론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포르노 문화의 영향이 컸다.) 발전한 나라, 무엇인가 대단한 곳처럼 느껴졌었다. 동시에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이 일본에 대한 욕설이었다. 일본에 대한 내 감정은 뒤죽박죽이었다. 무슨 연애사도 아닌데, 혼자서 애증의 관계를 반복했다. 객관적으로 일본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아마도 그것을 극복한 것은 몇 년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이 사라졌기도 하고, 편향됨이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 덜하지도 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미개한 원숭이 보듯 일본인을 멸시했던 감정이 남아있다. 하긴 대만인들이 태권도 판정에 불만을 품고, 태극기를 태우고 신라면을 밟는 것이 따지고 보면 그네들도 우리를 그렇게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일본에 대한 관심은 식었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중국이다. 웃긴 이야기로 가끔 말하기도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大望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전국시대를 다룬 일본대하소설)하고 삼국지를 읽어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군대라고 해봐야 몇 천명이야, 그런데 삼국지를 보면 최소가 몇 만이잖아.' 참 유치하기는 해도 이렇게 단순하게 그 차이를 설명하는 것도 없다.
하지만 이웃으로써 일본을 배제할 수는 없으며, 그들을 알아가는 과정은 매우 의미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주자학'이 어떻게 근세일본사회 즉, 에도 막부 시대에 이식되었는지 하는 과정은 특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주자학의 복잡한 사상에 대해서는 본서에서 나왔던 전국시대 다이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뭐라 설명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하물며, 에도 시대의 일본 유자들에 대한 사상적 배경이라든지 하는 복잡한 내용은 눈이 아플 지경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무척이나 어려운 책이었고, 아마도 전문 연구자들을 위한 책이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기로 했다.
와타나베 히로시는 원서 제목인 '근세일본사회와 송학(宋學)'에서 송학은 남성의 주희가 집대성한 이른바 주자학을 말한 것으로 대략 13세기에 공가 혹은 승려를 통해 전수되었다가, 17세기 이후 대량 유입되면서 삶, 인간관계, 세상살이, 정치 원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학자들이 생기면서 송학이 에도 시대 전개된 양상을 서술했다.
전국시대의 전란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2백년간 계속 되었다. 따라서 유학에 대한 관심은 고조되어, 진지하게 주자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나타났으나 소수를 차지했다. 따라서 에도 시대의 전반기, 5대 쇼군 쓰나요시 까지는 주자학이 정치, 윤리의 교설로 보급, 수용되지는 않았다. 무사 사회에서 학자는 존중되기는 했어도 보통 현실정치로부터는 격리되었다. 따라서 유자가 다이묘 가의 일원이더라도 곧바로 유교가 체제를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도쿠가와 쇼군을 정점으로 하는 당시의 사회정치체제는 본래 유학과는 관련이 없었다.
한편 주자학이라는 외래사상의 내용이 대체로 근세일본사회에 적합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먼저 정치체제의 형식에 대해 현실적으로 일본국왕의 지위를 가진 쇼군과 천황 중에서 누가 과연 천자인가에 문제를 가져왔다. 한편 신분제에 있어서도 유학과 에도시대는 어긋났다. 조닌은 통설과는 반대로 농민보다 신분상 상위에 있었다는 점을 보더라도 그렇다. 더 복잡한 문제는 국제관계 혹은 세계상의 기초범주인 화이관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유자는 자신이 태어난 나라가 곧 '중국'이며, 다른 나라가 바로 이적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중화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인종적, 지리적, 문화적, 도덕적 내용을 전부 털어내 버리고 완전히 형식적인 관념으로 하였다.
한편 士계층도 살펴보면, 중국의 사대부의 이념은 본래 전국시대의 다이묘, 무사의 통념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군신관계에 있어서 대의명분은 시공을 초월하여 지켜져야 하고, 혁명을 부정해야 했다. 천황에 대한 반역은 일절 단죄해야 했다. 게다가 군신의 대의와 결합하여 일종의 존왕론이 싹트고 있었다. 화이사상은 곧 '자국중화주의'를 재탄생시켰다. 존왕양이론의 한 원형이 이렇게 성립했다. 수기치인에 대해서도 일본에서 정주학의 책을 읽은 사람의 삶은 송대 이후의 중국의 관인, 사대부의 그것과는 다소 이질적이었다. 유학의 주된 청중, 독자이자 일본의 지배층이 무사들의 정치와 관련하는 방식이나 삶의 방식도 중국의 사대부와 달랐다.
덧붙여서 주자학의 家개념과 일본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중국, 조선과 일본의 家는 상당한 차이점이 존재했다. 일본에서 家는 개개인의 집합이라기보다는 개개인을 초월하여, 개개인을 이를테면 그때그때의 질료로 하는 형식적이고 영속적인 기구로 일종의 '법인(corporation)'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家에서는 동성혼과 이성양자를 금지했는데, 일본은 이성양자나 이성인 데릴사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이묘 이하 결코 드물지 않은 관행이었다. 가족도덕의 중심인 효는 근세일본의 유교 수용에서 주요한 회로 중 하나였다. 그런데 효를 이해하는 데도 주자학과 충돌이 생겼다. 근세일본에서 충과 효란 가업으로서 행하는 한가지 행위의 양면이었다.